
전주문화원과 신흥고등학교가 15일 오후 2시 신흥학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희현당사적비와 중수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조명을 위한 학술대회를 갖는다.
기조발제를 할 나종우 전주문화원장은 '희현당의 역사적 고찰과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을 주제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서원의 건립이 늘어나면서 희현당도 자연스럽게 건립됐다고 했다. 희현당은 조선 후기 호남지역의 흥학육재(興學育才)에 있어 인재선발, 교과목, 교육방법, 복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전통시대 교육행정을 알 수 있는 유산이다고 했다. 옛 사마재 자리와 영학(營學)으로 운영한 희현당의 위치를 확인해 주는 인문지리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 후기의 지방 관리의 애민(愛民)·위민(爲民)·교민(敎民)사상이 잘 나타나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큼을 살펴본다.
첫 번째 주제 발표는 김진돈 전북 문화재 위원이 금석학적으로 본 전주 희현당 연구를 살펴본다. 희현당 자리에 위치한 희현당사적비와 중수비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를 진행하는데, 희현당사적비에는 희현당을 창설한 관찰사 김시걸의 내력과 희현(希賢=希顯)이란 명칭을 설명한다. 희현(希顯)의 희(希)는 “장차 현인(賢人)을 바라고 성인(聖人)을 바란다”는 뜻이고, 현(顯)은 “장차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바로 옆 중수비에는 이후 관찰사로 부임한 이집이 희현당을 중수 할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아들 이주진에 의하여 학당이 크게 확장되고 중수되는 내력이 적혀 있다. 또 이주진은 전주에 와서 덕수이씨 완산화수회를 조직하여 1739년 기유년 중추에 시회를 가졌던 인물이다. 비문을 보면 김시걸과 이주진을 위해 사당을 만들고자 했던 기록이 이색적이다.
두 번째 주제는 희현당 철활자와 전라도(전주)의 위상이란 주제로 이태영 전북대명예교수가 발표한다. 희현당에서는 전라도에서 유일한 철활자로 책들을 발행했다. 고종 13년(1876)에 희현당을 창설한 김시걸의 '난곡선생년보'에 ‘希顯堂 活字 印’의 기록이 있다. 이 발문 기록의 내용은 희현당의 활자로 찍었다는 말이다. 또 '박공증이조참판충절록'에서도 ‘癸未 孟夏 希顯堂 開刊’이라는 간기가 있어, 순조 23(1823)년 4월에 희현당에서 인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흥고등학교에서 소장한 '정묘거의록'은 1798년(정조22)에 양호(호남·호서) 유생들이,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김장생이 양호호소사로서 의병 활동을 했던 기록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유생들이 호남지역 의병을 모집, 거의했던 사실을 상·중·하 3권 1책으로 정리하고 편집한 희현당철활자본이다. 호란 당시 양호 지방의 유림들의 행적과 규모를 밝혀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커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상태이다. 희현당철활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즉, 전라감영이 개입하여 정리자체를 모방하여 희현당철활자를 만든 것이다. 희현당철활자의 복원 작업은 이미 2010년에 시도됐다.
희현당의 사적비와 철활자에 대한 토론은 양건섭선생(신흥학교 역사 편찬위원)과 김종운 박사(전라역사문화연구소장)가 맡으며, 이병규박사(동학기념재단)가 사회를 본다.
전주문화원 나종우 원장과 신흥고등학교 임희종 교장은 "전주 시민은 희현당의 역사적 고찰과 지역사회에 키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살펴보고 향후 사적비의 대한 문화재적 가치도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바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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