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소씨가 황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민 까닭은] 아들도 얻고 과거에도 합격했다니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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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한국학호남진흥원 소식지 '호남학연구' 고문서와 옛 편지 쉰 네번째 이야기에 '특별한 날, 특별한 선물'에 전북의 의병장 황진(黃進)장군의 이야기가 소개돼 눈길을 끈다.

황진(黃進)은 아침부터 서둘렀다. 외할머니가 부른 까닭이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도착하니 집안 어르신인 방응남(房應男) 방덕준(房德駿) 방덕린(房德麟) 등이 이미 와 기다리고 있었다. 외할머니 표정이 무척 즐거워보였다. 외할머니 소씨가 황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용을 본 황진은 깜짝 놀랐다. '네가 지난 해 가을 무과(武科) 병과(丙科)에 입격하였으니 집안 경사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어 매우 기뻤다. 그래서 여종 세덕(世德), 사내종 수성(守成) 등과 주포에 있는 땅 열 마지기를 네게 준다' 1577년 2월 23일에 남원에 사는 방응성의 부인 소씨가 외손자 황진에게 준 별급문기. 여자종 1구, 사내종 1구와 땅 10마지기를 준다는 내용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다. 지난 해 무과를 잘 통과했다.

황진은 1576년(선조 9)에 무과 병과에 입격, 선전관이 됐다. 외할머니 소씨는 무척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외손자가 벼슬길에 오른 것이 대견하다고 무수히 칭찬했었다. 황진도 외할머니가 기뻐하니 덩달아 즐거웠다. 함께 기쁨을 나눈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소씨는 외손자인 황진을 데려다 옆에 두고 키웠다. 둘 사이는 모자의 정에 가까울 만큼 친밀했다. 황진은 외할머니가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선물까지 주실 줄 몰랐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무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년 전 아들 정직(廷稷)이 태어났을 때에 종 2구(口)와 땅을 주지 않았던가. 그때 외할머니가 보여준 기쁜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외할머니는 황진이 20대 중반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황씨 집안 대가 끊어질지 모른다고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 중에 아들을 낳았으니 외할머니가 얼마나 기뻤을까. 황진은 자신을 향한 외할머니의 애정이 두텁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황진을 향한 소씨의 애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진은 무관으로 벼슬살이를 했다. 1590년 황윤길, 김성일 등이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될 때 군관으로서 동행했다. 김성일이 돌아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기미가 없다고 보고하자 그것은 거짓 보고이니 김성일을 벌주라는 상소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 상소를 못했지만 일본의 침략 야욕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일본에서 돌아올 때 보검 2자루만 샀는데 ‘일본은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며 그때에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3년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결국 유탄을 맞아 전사했다. 소씨는 황진의 아들이 아버지를 잃은 것을 슬퍼하며 외증손자인 황정직에게 위로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종과 땅을 주기도 했다.

이 소식지는 황진은 물론 김명열, 기처겸 며느리인 나씨, 강여민의 며느리 오씨 등은 땅과 노비를 선물로 받았다고 했다. 땅과 노비는 조선시대 재산 목록 중 가장 값비싸고 유용한 것들이다. 그것들을 외할머니나 시아버지 등에게서 받아냈다. 이는 선물이라기보단 오히려 재산을 떼어 준 것에 가깝다. 정식으로 재산을 상속한 것이 아니고 특정한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혜택을 준 셈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기에 ‘별급’이라는 명목을 붙였다. 별급(別給)은 ‘특별히 준다.’ ‘따로 떼어 준다.’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이유로 인해 특별히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원하는 대상이나 원하는 때에 ‘따로’ 주는 것이다. 그 대상은 자식과 손자들, 며느리나 사위, 집안의 조카까지 꽤 범위가 넓었다. 그리고 ‘특별’한 동기가 있거나 ‘특별’한 때에 별급한다. 이를 테면 남들보다 뛰어난 효도를 했거나 과거 시험 합격했다거나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렸다가 득남했다든가, 며느리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오는 것 등은 일상적이지 않고 ‘특별’한 일이다. 그리하여 별급하는 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따로 주어야 할 마땅한 명분이나 이유를 반드시 써 넣었다. 재산에 속하는 것을 정식으로 상속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대상에게 주는 것이었으므로 별급은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문서 말미에 ‘혹시 따지는 이가 있으면 이 문 서’로 증명하라는 내용도 써 넣는다. 오로지 그 사람만의 소유로 만들어주었다.

한편 선물은 치명적인 것도 품고 있다. 알게 모르게 받는 사람에게 ‘책무’를 부여하기도 한다. 황진의 외할머니 소씨가 왜 선물을 했을까. 황진이 소씨를 잘 봉양하고 아들도 낳았다고 하면서 선물을 주었다. 선물을 준 동기가 받는 이에게는 ‘앞으로 해야할 어떤 책무’일 수도 있다. 앞으로 황진이 외할머니인 자신을 더욱더 잘 봉양하라는 바람을 넌지시 표현한 것은 아닐까. 기처겸이나 강여민은 ‘훌륭한 며느리’를 맞이한 일을 기뻐하면서 나씨와 오씨에게 선물을 건넸다. 조선후기에 나온 여성 교훈서를 보면 시집 어른들을 잘 봉양할 것, 시집 가족 및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낼 것, 집안 살림을 잘 꾸려 나갈 것 등을 써 놓았다. 당시 사회에서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내용이다. 처음 인사하러 오는 날 나씨와 오씨에게 선물을 한 사람들도 며느리의 책무를 다해야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한 것은 아닐까. 선물 속에 감춰진 또 하나의 힘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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