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달그락] 목숨을 바쳐가며 이루고자 했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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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출처=공훈전자사료관



■순국선열 기념의 날, 김상옥 의사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순국선열의 날이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 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한 날로서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지청천, 차이석 등의 인물이 처음 제정되었다. 이 기사에선 순국선열의 날을 기리기 위해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을 위해 일신과 목숨을 바친 분 중 한 분인 김상옥 의사(義士)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올해로 순국하신 지 100년이 된 한지(韓志) 김상옥 의사는 1889년 한성부, 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김상옥 의사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8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노동하며 생계를 도와 살아갔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14세부터 한문을 공부하며 낮에는 대장간에서 노동을, 밤에는 야학에 다니며 공부했다. 어느덧 성인이 된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약행상을 하며 자금을 모아 철물점을 개업했다. 약 행상을 하며 만난 한훈과 광복단에 가입하고 철물점에서 말총모자를 제조, 판매하며 독립운동을 하며 독립자금을 모았다.

김상옥 의사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19년 3월 1일 3.1운동 이후이다.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눈앞에서 한 여학생을 살해하려는 일본 경찰을 저지하며 그의 검을 빼앗았다. 그 일이 있고 한 달 뒤, 김상옥 의사는 혁신당을 조직하고 혁신 공보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열을 띄웠다. 6개월 동안 발행되던 혁신 공보는 일본에 의해 발각되며 신문 인쇄시설이 압수되고 김상옥 의사는 40일간의 고문 끝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김상옥 의사는 평화적인 방법으론 독립이 되지 않을 것을 느꼈고 1920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무기를 지원받고 자금을 모아 트럭 3대를 확보하였다. 모은 무기들로 조선총독부의 조선 총독, 고위 관료들을 처단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지만, 거사 직전 전에 인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고 동지가 체포되는 바람에 몇 개월간 준비한 계획은 실패하고 김상옥 의사는 만수 선양으로 피신하였다. 비록 계획이 실패하고 타국으로 피신한 상태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희망을 놓지 않았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다.

상해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김상옥 의사는 1922년 12월 1일에 조선 총독 암살을 목적으로 다시 조국에 돌아왔다. 대한민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암살단 동지를 규합하고 조선총독 암살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종로경찰서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김상옥 의사가 시험 삼아 던진 수류탄이 터졌다. 그는 심판통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고 비상이 걸린 일제의 경찰은 빠른 속도로 김상옥의 은신처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남산에도 숨고, 이모의 집에도 숨고, 옆집에 살던 이태성의 집까지 은신처로 활용하며 몸을 숨기던 김상옥 의사는 결국 동지가 발각되면서 그의 위치까지 탄로 났다. 1월22일 새벽 김상옥 의사를 잡으려 일본경찰 1000명이 동원되어 이태성의 집을 포위하였다. 양손에 권총을 한 자루씩 쥐고 수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던 그는 결국 총탄이 떨어져 마지막 한 발로 자결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김상옥 의사가 조국에 돌아오며 임시정부 동지들과 해어질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그가 남긴 말처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지키다 조국을 위해 자결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사는 것이 누군가에겐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루고자 했던 소망이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순국선열을 맞이하는 날이라도 그들의 살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박지호 인턴 청소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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