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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발걸음]백성은 쇠잔하나 행의(行宜)가 있는 선비를 자못 배출하였으니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1월 08일 15시02분

전북특별자치도 14개 시군의 가장 오래된 읍지는 1675년에 편찬된 임실읍지 󰡔운수지󰡕이다. 17세기 읍지는 대개 수령이 주도하여 편찬한 것이 특징이다. 󰡔운수지󰡕는 임실현감에 부임한 신계징과 고을 사람 한필상, 이시연과 함께 편찬하였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운수지가 발견된 것은 2023년 7월경이었으니 오래되었어도 새로움이 그윽하다.

읍지는 일반적으로 고을의 현황을 기록한 것으로 󰡔운수지󰡕에도 임실의 경계, 관원, 산천, 불우, 서원 및 학교, 장시, 교량, 누정, 관아, 수령명단, 문과 및 소과 합격자 현황, 그리고 각종 인물이 소개되어 있다. 대체로 산천조에는 이름있는 명산이나 하천에 대해서 소개하는데, 󰡔운수지󰡕에는 높거나 낮은 산과 봉우리, 크고 작은 고개, 실개천 등 임실에 사는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과 그 유래 등을 기록하였고, 수 많은 연못[淵]과 소(沼)는 모두 섬진강 지류에 있는 당시 말로 하면 명승에 해당하는 곳일 뿐 아니라 누군가의 세월을 낚는 누정이 있는 곳이다.

산천조에 보이는 광양산(光陽山)은 북삼면(현 관촌면) 용방리 서쪽에 있는 산이다. 광양현감이 병에 걸려 체직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산 아래에서 죽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광양산이나 용방리라는 지명을 특정할 수 없지만 현의 치소로부터 북쪽으로 12리라고 하였으니 임실역에서 관촌면 방향에 있는 용은치나 용산리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원(院)이 있었던 곳이다. 용은치에서 조금 더 가면 섬진강 오원천을 너머 오원역에 이르고 슬치를 통해 전주 관문인 만마관(萬馬關)에 이르니 아마도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내접산(來接山)에 얽힌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내접산은 임실군 덕치면 장암리에 위치한 작은 산이다. 섬진강 옥정호에서 흘러내린 물이 순창군 복흥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치천과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해 있다. 여기에 벚꽃이 아름다운 월파정의 맞은 편에 있으며 지금은 댁미산이라고도 부른다. 두 개의 봉우리를 가졌고 한쪽은 섬진강 본류에 가까이 있고, 나머지 삼면은 경지정리가 된 논으로 둘러 쌓여 솟아 있는 매우 특이한 산이다. 전주에서 구이, 강진역을 거쳐 순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 덕치면 장암리와 물우리 사이에 있는 섬진강 두물머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는 곳으로 그다지 높지 않은데 산이라 불렀다.

󰡔운수지󰡕 산천조에는 내접산에 대한 구전을 기록하였다. “산이 진안에서 물살에 휩쓸려 내려와 여기에 내접하여 고을에서 진안에 세공(歲貢)하였는데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동자가 진안의 차공사(差貢使)에게 말하기를,‘우리 고을에는 본디 명산이 많으니 이런 작은 산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옮겨 가시고 우리를 침학(侵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차사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돌아가 이 말을 보고하였고 이로부터 세공하는 침학이 없어졌다.”라고.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 설화를 연상하게 한다. 진안에서 왔다는 산에 명목을 붙여 세금을 거두었다는 진위나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고을의 고충을 해결한 동자의 재치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1675년 󰡔운수지󰡕를 편찬한 신계징 현감은 임실 백성들의 삶의 터전인 산천에 대해 기술한 후에 아마도 개인적 의견으로 추정되는데 다음과 같이 ‘고을평’을 덧붙였다. “높은 산이 많이 있고 들판은 드물다. 토양은 척박하고 백성은 쇠잔하다. 진실로 호남좌우도의 산마루 같은 고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비록 예관(禮冠)을 쓰는 고관(高官) 무리는 없었지만 행의(行宜)가 있는 선비를 자못 배출하였고 개벽(開闢) 이후 반역한 사람도 없다.”라고.

신계징은 임실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고을의 형세를 살펴보고 그 안에 백성들의 형편을 참작하여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운수지󰡕를 편찬하였을 것이다. 척박한 토지를 일구며 쇠잔한 삶을 살아가는 백성을 어여쁘게 여기는 마음, 그 마음으로 임실의 산천과 그 유래에 대해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운수지󰡕를 편찬하며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고을의 크고 작은 고개와 고갯길로 이어지는 마을과 마을, 그 마을 끝에 완산으로, 진안으로, 태인으로, 남원으로, 순창으로 이어지는 길도 익혔을 것이다. 2024년 갑진년 새해맞이 즈음하여 󰡔운수지󰡕의 행간 사이에서 목민관의 위민(爲民)과 애민(愛民)의 뜻을 되새겨본다. /김철배(임실군청,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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