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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다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 위에 세워두지”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5월 23일 14시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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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지은이 이다희, 펴낸 곳 문학과지성사)'은 현실의 틈새를 오가는 경쾌한 발걸음, 그리고

어긋나는 일상을 포착하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한껏 느끼게 하는 시집이다. 작가는 그동안 경쾌하지만 슬프고, 단정하지만 발칙한 언어를 구사하며 독보적인 시 세계를 선보여왔다. 이번 시집에서 이다희는 조금쯤 엇나간 현실의 틈새를 시적 장면으로 변모시키며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간다. 지난 시집에서 발랄하고 씩씩하게 일상을 꿰맞추던 화자들이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충돌하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이 되는 것처럼 사뭇 다른 시선으로 일상을 감각함으로써 이 세계의 예외적 존재들에게 반짝이는 왕관을 씌워준다.“우린 결코 같은 편이 아니지. 그렇지만 난 그저 네 편이야”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입춘(立春)'은 봄의 기운이 약동하는 이 계절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시다. 갑작스레 발효된 대설주의보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거리의 속도와 질감을 바꾼다.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사람보다 차가 더 천천히 간다”. 그러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녹기 마련이고, 폭설이 지난 후에는 “눈이 아닌 무엇인가가 인간을 사로잡는다”. 분명 무언가 일어났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러가는 세상에 묘한 괴리를 느껴본 적 있다면, “지나온 길에 꺾인 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얼음꽃”으로 만들어 기억하려는 시인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다희의 화자들은 세상의 인과관계를 납득하지 못하고, 그 규칙에 순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다. '샌드위치 시스템'의 화자는 “주먹 쥔 손등 위로 돋은 핏줄은 파란색인데 피는 왜 파란색이 아”닌지 고민한다. “피는 왜 파란색이 아닐까 눈은 왜 붉게 충혈되는가 붉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어째서 투명한가” 하는 물음이 이어진다. “요 며칠 먹은 것이 별로 없는데 거울 속 뺨은 붉고 건강하니 참 이상한 일”('미인이 하는 게임')이라 생각하고,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눈물이 나게 웃”('입 모양을 읽었거든')는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세상의 질서와 어긋나지만 “이런 기분을 품고 그냥 사는 일에도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고 “이렇게 살지 않는 일에도 각오가 필요하다”('사라진 대표님')는 점에서 일치를 이룬다. 실은 모두가 저마다의 비장함으로 세상과 대면하고 있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영임은 시 중반부에서 “발코니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인 화자의 행위를 예상치 못한 결말과 연결 지으며, 시가 끝나고도 이어지는 시적 시공간의 연장을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독자는 시의 장면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잡혀 있게 된다” 이처럼 남은 서사를 독자에게 맡기는 시적 전략은 불안과 외로움을 겪어내고 있는 이들이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빈칸을 채우게 한다. “앞뒤 다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에 세워”둘 때, 왕관을 쓴 “퀸은 종과 횡과 사선으로 움직일 수 있”('종과 횡과 사선으로')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을 읽는 일은 이해에서 상상으로, 다시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해와 상상과 믿음은 다르지만 서로를 서로에게 덮어씌우면서 소녀는 성장한다”('121분'). 이 절벽에서 기꺼이 뛰어내려 “눈을 뜨면 항상 맞춤인 내가 있”(뒤표지 글)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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