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전북론]백 번을 베어도 다시 버드나무길을 열 것이다

- 전주 미술인 "전주천 버드나무 이야기 전시전"에 붙여 - 26. 겨레의 시원문명과 버드나무길 버드나무 벌목은 겨레문명의 상징목을 죽이는 근대문명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다른 문화 문명을 용납하지 못하는 일방통행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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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문명의 일방적 폭력 버드나무 벌목 사건



전주 지역 미술인들이 전주시에 의해서 저질러진 전주천과 삼천의 버드나무 벌목에 예술로 '다시 버드나무길'을 열려고 나섰다. 후술하지만 버드나무길은 연속성 속의 '개벽문명'을 상징한다. 6월 3일부터 서학동 예술마을 '구석집'(전주시 완산구 서학3길 64-17)에서 '전주천 버드나무 이야기'라는 주제로 미술 작품 전시회를 6월 30일까지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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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가 김남수는 '홀본미학'에서 "버드나무 군락이 행사하는 존재생명계의 힘이 일렁이며 흐르는 '홀본'에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중략) 버드나무 군락은 식물계가 수계에 응답하는 합창의 형식이며, 그 합창은 강의 주변, 수변 공간에서 초미(初眉=첫 이마)의 치유력을 발휘한다."고 하였다.





버드나무를 벤 것은 나무를 없앤 반생태적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다. 버드나무 벌목은 겨레문명의 상징목을 죽이는 근대문명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다른 문화 문명을 용납하지 못하는 일방통행의 폭력이다.



우선 기술자로서 전주시 주장에 대해서 간략히 검토해 보겠다. 2002년 무주군 전역을 강타한 태풍 루사에 의해서 무주군 13개 하천 좌우안 99km가 수해를 입었다. 당시에 루사수해복구 기획을 맡았던 필자는 전주시가 "홍수 예방을 위해서 버드나무를 베었다"라는 주장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은골 앞 잠수교 쌍다리가 있는 한 상류부의 버드나무를 벤다고 해서 홍수가 예방되는 것은 아니다. 또 전주천과 삼천에 있는 하상차로와 교량 등의 높이도 기상이변 시대에는 홍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하상 경사와 재질, 제방의 기울기 및 재질, 도심 내에 우수관로가 가지는 홍수 배제 속도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홍수 예방 설계는 이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버드나무 벌목이 하천 저장 용량을 늘려서 홍수도달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만경강 합류부 기점수위(만경강은 새만금방조제 기점수위로부터)로부터 모든 조건을 고려해야만 한다. 전주시가 홍수 예방을 위해서 버드나무를 벌목했다고 하는 것은 수리수문학적으로 전혀 납득되지 않는 비과학적 주장이다. 홍수에 관한 내용은 여기서 그치기로 한다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 버드나무는 겨레의 신목(神木)이다



이번 "신생 전북론 26회"에서는 전주천 버드나무 벌목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버드나무는 우리겨레의 시원문명을 상징한다. 어째서 그런가?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를 필자는 문학적으로 '버들아씨'라 부른다. 버들아씨는 북방 물의 신 하백의 딸이고 천손인 해모수와의 사이에서 고주몽을 낳는다. 이는 하늘과 땅의 마주침을 상징하며, 그런 정신으로 홀본 고구려가 창업되었음을 말한다. 백제는 그 고구려에서 갈라진 나라다.



사람과 동물이 길을 내기 전에 지구에서 가장 먼저 생긴 길이 물길이다. 눈에 보이는 물길만이 물길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지하수도 물길이다. 인류 문명은 물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물은 모든 생명들의 기원이다. 홀본 고구려 창업 서사는 하늘, 땅, 물의 광휘(빛의 빛남)인 것이다. 그 상징목이 버드나무다. 버드나무는 하늘로 오르되 생명의 기원인 물을 잊지 않고 그 가지를 낭창하게 물가로 드리운다. 물의 윤슬과 빛과 바람에 의해서 뒤척이는 버드나무잎의 윤슬을 생각해 보라. 윤슬은 생명과 문명의 생성과 역동을 표현하는 순간들이다. 이 순간의 생성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비디오 아트 화면으로 송출한 예술가가 백남준이다라고 김남수는 말한 적이 있다.



만주족뿐 아니라 여러 족속들이 버드나무를 북방의 신목으로 삼았다. 2017년 북만주 일대를 답사했다. 연길 시를 흐르는 '부루하통하'는 '해란강'과 합수하여 '두만강'으로 흐른다. 부르하통하는 만주말로 '버드나무 우거진 강'이란 뜻이다. 화룡의 '해란강', 도문의 '두만강',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 '수분하' 등 만주의 강들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졌다.



3. 김남수의 홀본미학(忽本美學)에서 백제(百濟)로의 여정



홀본(忽本)은 고주몽이 고구려 첫 도읍으로 삼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홀본과 버드나무에 얽힌 서사와 미학(美學)을 문화 비평가이자 철학가인 김남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략) 사실 고구려 건국의 추모 또한 애초에 '홀본부여'의 왕으로서 즉위한 것이고, 이 '홀본'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송화강 하백신의 따님 유화(柳花)가 갖는 문화와 권능에 의해 변형된다. '홀본'의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송화강의 모래톱과 버드나무 군락이 행사하는 존재생명계의 힘이 일렁이며 흐르는 '홀본'에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중략) 버드나무는 이렇게 모래와 모래톱이 있는 강의 어귀들, 언덕들 그리고 땅 속으로 나 있는 수관(水管)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피어나 군락을 이룬다. 버드나무 군락은 식물계가 수계에 응답하는 합창의 형식이며, 그 합창은 강의 주변, 수변 공간에서 초미(初眉=첫 이마)의 치유력을 발휘한다. 김지하는 세계적인 에코페미니즘 철학자 발 플럼우드의 발표 -- 2003년 파주 세계생명문화포럼 -- 에 힘입어 대응하는 두 생명 단위가 서로 교감할 때 빛과 소리와 물류 교환으로 상호치유한다는 것, <산해경>과 <산경표>에서 신물활론적인 교감신경계 작용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홀본' 문화의 새로운 습합이 일어난 상태에서 추모가 남하하여 '홀본부여'의 왕이 되었고, 그후 고구려 건국에 나서게 되었다. 그에 따라 본래 그 지역의 맹주였던 소서노와 그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남하하게 된다.



백제(百濟)의 제(濟)는 "건너다" 라는 뜻이며, 이는 '홀본'의 광휘가 일렁이는 크고 작은 물을 건넌다는 것이다. 그 일렁임에 비류(沸流)적인 측면이 가미되어 솟구쳐오르는 움직임이 있다. 말하자면 샘물이 솟아나면서 물결의 파형이 생성된다고 하겠다.



아마도 '홀본부여'가 어디로 비정되는가에 따라 그 물이 어디인가 특정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일렁이며 솟아나는) 물을 건너다" 라는 사건이 소서노, 비류, 온조와 그의 무리가 거듭거듭 경험하고 내면화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라고 쓰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백제는 나중에 곰나루, 즉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기고 곰신화에 얽힌 북방계 문화를 환기하면서 금강 유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동굴이라는 장소에서 삼칠일 햇빛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 즉 '홀본'을 멀리하는 명계(冥界)체험을 통하여 존재 양식을 바꾸었듯이 이번에는 강이라는 장소에서 '홀본'을 새롭게 맞이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여전히 '홀본'을 어떻게 상대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 후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다시 물을 건너는데, "일렁이는 물 위에 반사광" 즉 태양윤슬이 곧 일본(日本, 인용자 주 - 일본국을 말함이 아니다.)으로 모델화된 것은 백제의 이러한 기나긴 여정 속에서 확정된 것이라 본다." - 출처 2024.5.31 김남수, 페이스북 -



4. 찰나의 광휘, 문명 생성의 역동, 버드나무길을 열다



김남수의 논의는 곱씹을 대목이 많다. 2017년에 버드나무길을 생각하면서 북만주를 답사했는데 이렇게 썼다.



"버들아씨! 너는 햇볕의 아내, 물의 딸, 바람의 연인, 봄의 화살, 삼족오 깃털 꽂은 사내들의 어머니였다. 동무밖에 되지 못하는 사랑이 하늘거리는 봄밤, 쑥 냄새나는 봄비가 내리는데, 내 뜰에는 버들 한 이파리도 날리지 않는다."



이 글에서 버드나무잎은 우리 문명의 연속성 속에서 새로운 문명 생성의 꿈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김남수에게서는 홀본미학으로, 백제미학의 여정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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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수 판화 '전주남천', 강에서 솟아 하늘로 오르다가 다시 물로 회통한다. 버드나무와 강이 생성하는 빛의 윤슬은 천지인(天地人)이 대합장하는 빛의 빛남이다. 버드나무가 강과 사람과 마을에서 하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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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장미연 '그리움', 우 진창윤 '그루터기',



'그리움'은 우주의 소용돌이 속에 버드나무를 탄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우주와 존재를 잇는 생성의 미학이다.



'그루터기'는 생명의 역설은 죽음이고 죽음은 신생의 역설이다를 강렬한 색감으로 드러낸다. 혈맥의 절단 속에서도 생명은 빛을 타전한다.





누구에게는 그저 흔한 나무의 한 종류일지 모르겠으나, 서구정신이나 미학에 가려진 우리정신과 미학으로서 또 장차 개벽문명을 선도할 전라도&;전주의 상징적 광휘로서 버드나무는 저 북방의 바이칼까지 개벽의 길을 내며 문명의 윤슬을 광휘하는 것이다.



서학동 예술촌 구석집()에서 열리는 "전주천 버드나무 이야기전"은 베어도 죽지 않는 이 땅의 지층에 흐르는 기운을 감응하는 일이다.

김남수의 표현으로는 "비류(沸流 - 솟구쳐 흐르는)하는", 미술비평가이자 다석 철학가인 김종길의 표현을 쓰면 "뚫어솟난"하는, 인문학교육연구소장 양진호에 따르면 "신을 낳는" 일이다. 저항은 무엇에 반발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감응하지 못하지만 겨레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흐르는 기운에 감응하여 자본과 개발, 성장의 폭력으로 얼룩진 근대문명을 열 번 백 번이라도 건너고 돌파하는 "백제"인 것이다.



심홍재, 유대수, 진창윤, 한숙, 장미연, 이지은, 이혜민 등이 작품을 출품했다.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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