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황씨의 첫 뿌리는 중국 한나라 시대 유신이었던 황락(黃洛)이 신라 남해안에 정착하면서 한국 황씨의 도시조(都始祖 성씨의 최고 조상)가 되었다. 그의 장남 갑고는 평해군, 둘째 을고는 장수군, 셋째 병고는 창원백으로 봉해졌는데 을고가 장수황씨의 시조라는 설이 일반적이나 근거할 만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황석부를 일세 조로 하고 장수황씨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장수황씨의 조상들은 몇 대를 거쳐 부족이 늘어나면서 정착할 수 있는 영토를 찾아 북상하기 시작했고 육십령고개를 넘어 장수 땅을 밟게 된다. 육십령고개는 덕유산 정상에서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줄기로 현재 장계면 명덕리와 경남 함양군의 경계를 이룬 곳으로 정상에 오르면 장수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수황씨세계 시조 편을 보면 1170년(의종 24년) 대장군 정중부를 비롯해 이의문, 이의방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켰고 황 씨의 중시조인 전중감공 황공유가 난을 피해 고향 땅인 장수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황씨 족보나 역사학자들의 중론으로 볼 때 황희의 출생지는 개성(송도) 가조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수문화원이 발행한 『장수군지』를 보면 “군서공이 장수 현감으로 부임하여 장수현 수내면 선창리 당동에 있던 내아(관사)에서 탄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지방으로 발령받은 수령들이 부임지에서 자녀를 낳아도 출생지는 본주소(本主所)로 행세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장수현에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된다.
최용표의 『長水의 넋(魂)을 찾아서 나의 문화답사기』를 보면 부친 황군서 공이 장수 현감으로 재직 시 황희를 잉태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개성으로 발령지를 옮기면서 황희를 출생했다는 설로 장수를 잉태 지로 보고 있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황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 읽기를 좋아해서 밤늦도록 학문에 힘썼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376년(우왕 2년) 14세의 나이에 음서로 복안궁 녹사(錄事)에 제수되었으나 일정한 직무가 없는 산직(散職)의 형식적인 벼슬이었다. 현재로 보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고려시대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이미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해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 있었고 1392년 끝내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왕조의 교체는 봉직하는 관리들에게 큰 파란을 일으켰다. 많은 관리가 숙청되거나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고 황희 역시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태조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다시 조정에 나왔고 세자우정자로 임명되어 조선왕조 최초 세자로 책봉된 의안대군 이방석의 예의범절과 학문을 가르치고 호위하는 등의 업무를 맡는다.
태조를 이어 왕좌에 오른 정종은 부정과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황희의 올곧은 성품을 좋게 보긴 했으나 중책을 맡기지는 않아서 역량을 발휘할 만한 계기가 생기지는 못했다. 오히려 원칙을 고수하는 올곧음으로 인해 면직되기까지 했다.
1401년(태종 원년) 39세가 된 황희는 드디어 태종의 명으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새로운 중책들이 맡겨질 때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점점 관료들 사이에서 업무에 충실하고 유능하다는 평을 듣게 되었고 황희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태종은 조선시대 초기 불안한 정국과 왕권을 굳건히 하기 위해 황희의 강직함과 명석한 두뇌를 필요로 하면서 그를 더욱 곁에 두려고 했다.
----다음 편에 계속
/박용근(전북자치도의회의원·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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