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희의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방촌(尨村)이다. 그는 1363년(공민왕 12)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희는 고려가 망한 후에는 벼슬길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둔했다. 그러나 태조가 여러 번 황희를 조정으로 불렀고, 은둔했던 고려의 충신들도 “황희가 나가지 않으면 백성이 어떻게 되겠느냐?”며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했다. 이후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에 이어 세종, 문종까지 다섯 왕을 보필하며 정사를 폈다.
황희는 검소하고 청렴했던 청백리의 표상으로 묘사된다. 황희는 자신의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던 세종과 젊은 집현전 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조화롭게 정치력을 발휘했다. 강직함과 유연함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명재상으로 꼽히고 있는 황희의 리더십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402년(태종 2년) 태종은 부친 의정공 군서의 죽음으로 상중에 있었던 황희에게 기복(起復)을 적용시켜 백일 만에 대호군에 임명하고 승추부 경력을 겸직하게 했다.
당시 유교 의례에 따르면 부모상을 당하면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부모의 상중이라도 나라에서 꼭 필요하다면 관직을 맡게 하는 기복 법으로 다음 해에 황희를 불러들인 것이다.
태종은 병권을 일원화해서 왕에 귀속시키는 조치로 중추원을 혁파해 사병들을 없애고 승추부를 세웠다. 정치개혁의 산물인 승추부를 맡길만한 인물로 황희가 제격이었고 그의 충심을 다시 한 번 시험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됐다.
1427년(세종 9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세종 역시 3개월 만에 기복을 적용해 그를 좌의정에 올렸다. 조선시대에 기복을 받은 관료는 몇 사람에 불과하다. 조정의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되었고 복직 명령서가 발부되기까지 여러 부서를 거쳐 관료들의 승인과 왕의 윤허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황희는 두 번이나 기복을 받았으니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굳건해졌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1405년(태종 5년) 박석명의 추천으로 지신사(도승지)에 발탁된 황희는 이때부터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지신사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 격으로 단 한 사람만 선택됐으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모시는 중요 직책이었다.
왕의 비서 일부터 왕이 내리는 교지와 신하들이 올리는 글을 비롯해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긴 문서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러므로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입이 무겁고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왕의 심중을 빨리 알아채고 거들 수 있는 총명함과 민첩성을 갖추어야 했다.
박석명은 황희보다 7살 어렸지만 16세 때 과거에 합격해 4년이나 먼저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품계도 14년이나 빨리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공양왕의 아우 귀의군 왕우의 사위였는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7년간 은거하고 있었다가 1399년(정종 1년) 고려의 구신들이 등용되면서 다시 정3품 벼슬에 올랐다. 이후 안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지신사가 되었고 태종 때에도 지신사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권력자가 아닐 수 없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벗으로 친하게 지냈던 박석명을 총애했고 오랫동안 지신사로 곁에 두고 의지했다. 그가 사직하기를 청했을 때 태종은 불안해하며 뒤를 이어 똑같이 일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를 고민했다.
평소 박석명은 어린 자신을 윗사람으로 정중히 대하는 황희의 인품과 소신 있는 행동, 공정한 업무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조정의 신하 중에는 적당한 사람이 없고 오직 승추부사 황희가 참으로 괜찮은 사람입니다.”라고 아뢰며 황희를 추천한다. 태종은 그의 말을 믿었고 곧바로 황희를 등용하게 된다.
인재를 알아본 박석명의 선견지명은 후에 세상 사람들도 “사람을 알아보는 훌륭한 인물이었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지신사로 임명된 황희는 모든 기밀 업무를 맡아보았다. 태종은 “이 일은 경만 알고 있으니 만일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라면서 그를 의논 대상으로 삼았고 신임했다.
국정을 운영하는데 있어 관후함만을 보이지 않았던 황희는 간언과 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는 직언으로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왕이 옳은 일을 하면 받들고 실천했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반대 뜻을 보였다.
왕의 총애를 받는 황희를 모든 관료가 인정하지는 않았다. 조정 관료들을 균형 있고 조화롭게 다스리는 일도 그의 몫이었으니 모두의 만족을 이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시기하고 모함했던 사람들은 그를 끌어내릴 수 있는 구실을 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태종은 황희의 과실을 트집 잡으며 상소를 올렸던 대신들의 말을 무시하고 끝까지 황희의 편을 들어주었고 왕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황희는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주역으로 급성장했다.
황희에게 날개를 달아준 태종의 무한한 신망은 그의 올바른 판단력과 공명정대함,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종의 전폭적인 지지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화려한 공직 이력을 남기며 조선의 거목으로 황희를 우뚝 서게 했다.
황희는 조선의 4대 임금을 모시면서 24년간 재상으로 있었고 그중 18년을 영의정으로 그리고 좌의정 1번, 우의정 1번, 찬성 1번, 참찬 2번, 의정부 지사 1번, 의정부 참지사 1번, 이조판서 3번, 예조판서 3번, 형조판서 2번, 호조판서 1번, 병조판서 2번, 공조판서 1번, 대사헌 3번, 한성부윤 1번 등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한 관직 경력을 갖고 있다.
육조판서를 두루 거쳤던 그는 오늘날의 행정부(이조), 외교문화교육부(예조), 재정경제부(호조), 국방부(병조), 건설산업부(공조), 법무부(형조) 장관직을 모두 역임했고 국정 전반을 통제하고 총괄하는 국무총리 직을 최장기 맡았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굽히지 않는 원칙주의자고 완고한 성품 탓에 왕의 노여움과 대신들의 모함을 받아 좌천 2번, 파직 3번, 서인 1번, 귀양살이 4년을 겪으면서 파직과 복직을 되풀이했다.
권력이 강해질수록 누릴 수 있는 특혜는 많아진다. 권력을 움켜쥔 기간이 길어질수록 욕망의 경계는 허물어져 부패와 부정의가 판을 친다. 아첨꾼들은 그 힘을 제 것처럼 누리고자 하는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뜻하는 바를 얻고자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
그러다가 권력자가 행실에 문제가 생겨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온갖 음모와 비리를 만들어 권력을 빼앗으려고 덤벼든다.
우리는 그런 무리에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소신과 정의,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도덕성을 갖춘 진정한 지도자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매 순간의 유혹을 결국 이기지 못하고 부정을 저지르고 추락하는 지도자를 보고 만다.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역사를 통해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사진 첨부>
1. 효령대군 기념관에 전시된 태종 상상 어진(나무위키에서 캡처)
2. 상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희 친필
필자 소개
필자 박용근은 전북대학교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고, 노무현 정부 산업자원부 정책보좌관과 기획예산처 정책보좌관을 지냈다. 전북대학교 산학협력교수를 역임했고, 전주한지문화축제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현재는 전북특별자치도의원(삼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 나는 공자를 만난다’와 ‘이성계 리더십의 비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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