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방촌기념관 내에 있는 방촌황희선생 동상
황희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가 관여한 국정 업무들은 방대해졌다.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으니 합법적 형평성은 늘 논란의 실마리를 남겼다. 황희는 공적인 업무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이 생길까를 염려하며 늘 경계하고 소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인간사에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뜻밖의 난관으로 곤욕을 치르며 그동안 쌓아온 이력에 흠집이 생기기도 한다.
1408년(태종 8년) 8월 지신사로 있던 황희가 처음으로 사직서를 낸다. 그의 나이 46세 때 일이다. 이유는 판사 박유손이 인사 비리를 의심해서 황희에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군대조직이었던 별시위의 우두머리를 뽑는 과정에서 세 사람의 후보가 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박유손이었다. 그런데 병조의 천거를 받았음에도 세 번째 후보였던 황한우라는 인물이 임명된 것이다.
이에 분노한 박유손은 황희의 집에 찾아가 따져 물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소상히 밝히라며 언쟁을 벌였다.

양녕대군 이제 묘역 지덕사 전경(나무위키에서 캡처)
이 일을 조사하기 위해 사간원이 나섰는데 오히려 박유손을 징계해야 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박유손이 임명받지 못한 것에 악감정을 가지고 법도를 무시한 채 황희의 집에까지 찾아가 트집을 잡고 따져 물은 것은 곧 전하의 명령을 업신여긴 것과 같다.”라며 그에게 죄가 있으니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태종은 사헌부에 명해 박유손을 유배 보내고 황희에게는 계속 일을 보게 했다.
황희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들로 벌어진 사건 중 노비로 얽힌 세 가지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1416년(태종 16년) 6월 황희를 비난하는 부원군 하륜의 글이 올라왔다.
그는 “황희는 매우 간악한 소인으로 정부(政府)·육조(六曹)와 이조(吏曹)에 있는 것도 마땅하지 못하고 인사행정을 맡는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라고 비방했다.
하륜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제도를 개편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의정부 권한을 축소하고 6 조직 판서들의 권한을 확대해 왕권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이중무 노비 오결 사건과 홍유룡 첩이 퍼뜨린 소문을 언급하면서 황희를 비난했다.
이중무 노비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경승부윤(敬承府尹) 이현의 딸은 행수 이중무의 아내인데 이지호란 사람이 그녀를 양녀로 삼았다. 이현은 딸의 몫으로 노비와 재산을 이지호에게 넘겨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호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 자기의 종이었지만 이지호를 아들로 삼았던 장수라는 사람이 이지호의 노비는 자기 노비라고 이중무와 소송을 벌인 것이다.
조선시대 노비는 천민이긴 했으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받았고 재산을 매매하고 상속하거나 양도할 수도 있었다. 다만 노비에게 자녀가 없으면 소유주가 그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중무의 아내는 이지호의 친딸이 아니므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나 추측한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이현은 소장 접수 기간이 지났는데도 장수가 잘못한 것처럼 거짓으로 소장을 써서 제출했다. 사헌부는 이현의 소장만 믿고 이중무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에 장수는 신문고를 울려 판결이 잘못됐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사해 보니 육조판서들이 소송 관련 문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오히려 장수에게 죄를 물어 노비를 모두 관아에 소속시킨 것이었다. 기한 내에 소장이 접수된 것으로 처리한 것도 모자라 소송을 심리하지도 않았고 육조에서 교지도 따르지 않고 잘못 판결한 것이 드러났다.
이에 태종은 그 책임을 물어 황희를 파직시키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복직시켰다.
두 번째 사건은 전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홍유룡의 첩 정향이 “황희가 근거 없는 노비를 사용하고 있다.”라는 헛소문을 퍼트린 일이다. 정향은 공공연하게 황희를 헐뜯으면서 거짓 소문을 만들었다.
태종은 바로 의금부에 명해 정향과 홍유룡을 잡아들였고 황희가 죄가 없음을 자백받아 황희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을 벌했다.
이중무 노비 오결 사건은 엄밀히 살피지 못한 황희의 잘못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일은 뜬소문으로 그를 시기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노비 사건으로 곤혹스러움을 겪은 일은 또 있다. 소사란 여인이 노비 소송을 청구했는데 판결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소사는 남편 김경을 시켜 소장을 써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나가 “황희 판서가 쓴 문서 때문에 판결이 잘못된 것입니다.”라며 호소하게 했다.
이에 태종이 의정부, 의금부, 한성부, 형조, 도관, 대헌에 명하여 조사하게 했고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태종은 황희를 모함한 김경과 소사에게 벌을 내리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으나 황희는 오랫동안 노비 소송에 관련된 오해로 구설에 시달려야 했다.
황희에 얽힌 오해와 진실 중 일생일대의 사건은 세자 양녕을 두고 태종과 맞선 것이다.
1416년(태종 16년) 세자 양녕이 방탕한 생활을 고치지 못하자 태종은 세자를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구종수라는 자가 세자궁에 몰래 들어가 술을 마시며 놀거나 늦은 밤 세자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 잔치를 열고 여색을 바치는 등 난잡한 짓을 벌인 사실을 태종이 알게 되었다.
화가 난 태종이 황희를 불러 어찌해야 할지를 물었다. 황희는 “세자가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이니, 큰 과실은 아닙니다.”라며 양녕 편을 들어 주었다. 태종은 황희의 말에 따라 일을 더 키우지 않고 구종수를 장 1백 대를 치고 귀양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 또 세자가 구종수의 주선으로 만난 곽선의 첩 어리를 간통하고 궁중에 들인 일이 발각되었다.
분노한 태종은 과거 구종수와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참형에 처하고 세자를 옹호했던 황희를 평안도 도순문사 겸 평양 윤으로 좌천시켰다가 다음 해 1월 판한성부사로 제수하고 한양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양녕은 자숙하지 못하고 계속 어리를 만났고 아이까지 갖는다. 부끄러움이나 뉘우침도 없이 도리어 원망만 하는 양녕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태종은 급기야 신료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세자를 폐위하고 경기도 광주로 추방했다. 그리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봉한다.
끝까지 양녕 편을 들었던 황희에게 크게 실망한 태종은 처음으로 황희를 원망하며 보기를 꺼렸고 황희의 죄를 벌하라는 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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