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태종에게 버림받고 유배길에 오른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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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수에서의 유배 생활



끝까지 양녕의 폐위를 반대했던 황희를 좌의정 박은 등과 훈구대신들은 “주상의 은혜를 받고도 올바른 대답을 하지 않은 간사한 황희의 죄를 징계해달라”고 상소했다.

편법과 예외를 두면서까지 황희를 곁에 두려 했던 태종 역시 황희를 향한 배신감으로 화를 참지 못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섬기고 목숨까지 바치리라 여겼던 황희가 혹시 차기 왕이 될 세자에게 아부를 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어쩌면 황희는 조선 초기 왕권 강화를 확립하기 위해 적장자 승계로 반드시 왕통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양녕대군에게 정이 들었을 것이고 아직 어리므로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인성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대간들의 탄핵이 계속되자 태종은 그동안 쌓아온 공을 인정해 황희를 파주 교하 땅에 보내 편히 살라고 명한다, 그러나 대간들은 중죄임을 강조하면서 무거운 처벌을 원했고 결국 남원부 장수현으로 유배를 결정한다.

“내가 죽는 날에 황희가 따라 죽기를 원한다.”라고 말했을 만큼 황희를 충신이라 믿고 의지했던 태종은 자기 대신 세자 편을 들었던 서운함을 드러내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태종은 사헌부에 일러 관리가 황희를 죄인처럼 압송하지 못하도록 명하고 노모를 모시고 스스로 편히 내려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황희는 “임금의 은덕을 결코 배반한 것도 아니고 다른 마음을 품은 것도 절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자책했다.

태종도 황희가 불손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알았을 것이다. 대간들이 세자의 잘못만을 끄집어내어 폐위를 논하고 있었을 때, 오직 황희만이 자기 아들을 지켜주고자 했던 관대한 마음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다만 왕권을 강화해야 했던 시점에서 차기 왕에 오를 세자의 허물을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백성들을 이끌어야 할 왕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아들 양녕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비통한 아버지의 심정도 황희가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태종의 단호한 결정으로 우리는 역사상 최고의 임금 세종대왕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황희 역시 겸허함과 관대함을 뼛속까지 새기며 평생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렇다면 태종은 왜 죄인 황희의 유배지를 장수로 선택했을까.

한양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장수는 황희의 본관이자 황희의 조부, 부모님이 지냈던 지역이고 오래전부터 문중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산 것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늙으신 어머니를 좀 더 익숙한 곳에서 편하게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한 태종의 심중에는 긴 휴가를 준 것뿐, 결코 황희를 죄인으로 내치지 않겠다는 마음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황희의 유배지를 남원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장수군지』를 보면 유배지인 장계면 월강리 도장마을에서 3대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방촌황희선생문집』에서는 장수읍 선창리가 유배지였고 선창리 앞쪽 들을 ‘황정들’, ‘방촌들’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월강리이든 선창리이든 장수 사람들은 황희가 분명 장수 지역으로 내려온 것이 사실이라 믿고 있으며 장수와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선생의 높은 덕과 업을 기리고 있다.

유배지로 알려진 장수 도장마을이 남원으로 알려진 것은 당시 장수현이 남원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남원 도호부 아래 장수·임실·무주·곡성·진안·용담·옥과·운봉·창평 9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마을을 품고 있는 장계면 월강리는 깃대봉 남서쪽부터 장계천을 넘어 계남면 호덕리 경계까지 동서로 길게 이어진 지형으로 그 중앙에 도장마을이 있다.

마을이 길어 진말이고도 불렸는데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따라 위쪽 마을을 ‘진말’, 아래쪽 마을을 ‘도장’이라 부른다.

장수황씨의 후손들이 살았던 이곳은 고분군과 다양한 토기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어 오래전부터 생활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수현으로 황희가 왔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이 그를 보려고 마을로 몰려왔다. 유배 중인 황희였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사라지지 않은 것을 알기에 정계로 진출하기 위해 줄을 대려는 사람들로 마을 전체가 들썩였다.

그러나 황희는 대문을 닫고 일체 손님들과 만나지 않았다. 왕이 베풀어 주신 은덕에 감사하면서 임금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고자 함이었다.

귀양 중에 황희가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담아 쓴 것으로 보이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청계상(淸溪上) 초당외(草堂外)에 봄은 어이 늦었는고

이화백설향(梨花白雪香)에 유색황금눈(柳色黃金嫩)이로다

만학운(萬壑雲) 촉백성중(蜀魄聲中)에 춘사망연(春思茫然)하여라



마지막 구절의 촉백성중은 중국 촉나라 황제가 억울하게 죽은 뒤에 그 넋이 두견새(소쩍새)가 되어 운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이다.

배꽃 향기 가득하고 버들가지 새 움이 돋는 봄이 왔건만 황희가 지내는 초가집에 봄은 늦게 찾아오고 구름 속 두견새 울음처럼 아득하기만 하다는 의미를 담은 듯하다. 임금께서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황희는 방문객을 사절하고 『예부운략(禮部韻略)』 운서 한 질을 벗 삼아 공부에만 전념했다. 이 책은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것으로 시 등을 지을 때 운을 찾기 위해 만든 운서로 사전의 일종이며 주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의 필독서였다.

유배 생활을 통해 황희는 한층 더 온후해졌고 다시 정사에 임했을 때는 자기 절제와 공명정대함을 잃지 않았다.

도장마을에는 황희가 유배 당시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아직도 우람한 모습으로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황희가 유배를 온 해가 1418년이었으니 어느덧 600살이 넘었다.

당당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넉넉한 그늘을 내어주며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주는 풍채가 황희의 성품을 닮은듯하다.

황희를 돌봐주기 위해 증손자인 황상도 장수로 따라와 터를 잡고 살았다. 도장마을에 터전을 마련한 황상은 황희의 유배가 끝나고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고 이후 황희의 외손자 전주이씨 이경광에게 살던 집을 넘겨주고 호덕동으로 이사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황곡리로 불렀다는데 지금은 금덕리 호덕마을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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