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굶어 죽는 강원도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종의 신임을 얻은 황희

8회 유배를 끝내고 세종을 알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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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삼척 소공대비(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제107호)- 삼척시청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4년 후, 태종은 60세가 된 황희를 다시 서울로 불러들였다. 자신이 죽고 나면 죄인이라 여기는 황희를 세종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충심과 능력은 빛을 잃을 것이 뻔했다.

그동안 유배지에서 황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사람을 시켜 보고 받아왔던 태종은 자숙의 시간을 가지며 겸허한 생활을 하고 있던 황희의 일상을 들으면서 서운했던 마음도 누그러졌다.



태종은 세종에게 “비록 죄를 범했으나 일에 익숙한 구인(舊人)이므로 버릴 수 없으니 가히 불러서 쓸만하다.”라고 말하면서 꼭 써야 할 인재라고 추천한다.

황희의 강직한 성품과 충직함,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정확한 판단력을 지켜봤던 태종은 그의 업무 파악과 처리 능력, 새로운 정책 시행까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런 신하가 반드시 세종 곁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 후 서울로 올라온 황희를 후하게 대접하도록 명하고 관직과 과전을 돌려주고 그가 복귀할 수 있도록 세종을 설득했다. 태종의 도움으로 황희는 10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었다가 다음 해 예조판서에 올랐다.

태종의 우려대로 죄인인 황희를 용서하지 말고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세종에게 올라왔다.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 등에서 잇따라 “황희는 관직에 있을 때 난적 구종수의 죄를 거짓으로 가볍게 다루었고 주상이 친히 물을 때에도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충성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자의 경계를 삼아 처형해야 합니다.”라면서 법대로 처결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태상왕께서 스스로 결단한 것이고 이미 서울로 돌아왔으니 이를 고칠 수 없다.”라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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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산양서원 묘정비(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제123호)- 삼척시청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태종을 이어 즉위한 세종은 선대 왕들이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을 잘 계승할 것을 반포하며 제도는 모두 태조와 부왕께서 이루어 놓은 법도를 따라 할 것이고 변경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세종실록》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11일 기사를 보면 “태조께서 나라를 일으키고 부왕 전하께서 큰 사업을 이어받아 삼가고 조심하면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충성이 천자에 이르렀다. 효와 공경함이 신의 명에 통하여 나라 안팎을 평안하게 다스리고 나라의 창고가 넉넉하고 가득 차며 해적이 와서 복종하고 법령으로 다스리는 정치는 융성하고 무위는 떨치었다.”라면서 선대 왕들의 업적을 기렸다.

그 뒤를 이어가면서 자신만의 정치적 도약을 꿈꿨던 세종은 예법을 유지하고 지키되 부족한 것은 채우면서 새롭고 탄탄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세종은 정무에 대한 모든 일을 대간들에게 물었고 의논과 토론을 벌이며 열정적이고 일관된 모습을 유지했다.



1423년(세종 5년) 강원도에 극심한 기근이 들자, 세종은 해결책을 마련하라며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보낸다.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다.

당시 강원도 관찰사 이명덕은 백성을 구휼하는데 실패했고 백성들의 원성은 커져만 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백성들의 절박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 황희는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발 빠르게 방책을 내놓았다.



강원도로 내려온 지 사흘 만에 각 고을 관사에서 바치는 공물의 감면을 청했고 2개월 후 세금으로 거둔 돈으로 종자와 양식을 마련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며 강원도에서 섣달에 바치는 산돼지, 노루, 사슴의 진상을 면제받았다.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긴급히 알려 강원도 도민을 살리기 위한 진휼책들을 건의했다. 1424년(세종 6년) 2월 6일, 첫 번째로 도내 백성의 총계가 1만 6천여 호인데 이들 대부분이 환자곡(還子穀 각 고을에서 흉년이나 춘궁기에 대여하고 추수기에 환수하는 곡식)을 먹지 않고 생활하는 자가 얼마 없고 초식으로 겨우 생명만 유지하고 있다고 알렸다.

두 번째로 이들의 실정을 조사하고 보고한 후에 회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도와주기에는 백성들의 생명이 위태로울 뿐 아니라 곡식 종자도 나누어 줄 수 없어서 농사를 지을 시기도 놓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므로 의창의 환자곡 중 6만 2천 4백여 석을 먼저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살게 하여 농사를 짓게 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는 동안 도민의 궁핍을 염려하며 쌀과 반찬 없이 보리쌀로 끓인 죽만 먹었다고 한다. 또 강원도에 많이 있는 대나무를 이용해 연한 순을 넣어 밥을 짓는 ‘죽실반’이라는 음식을 만들어 굶고 있는 도민들을 구제했다.

관찰사가 모범을 보이니 다른 관원들과 곡식을 가진 사람들도 식량을 절약해서 굶주린 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황희의 적극적인 추진력으로 기근 문제를 해결하자 강원도 백성들은 소공대(召公臺)를 만들어 그의 공적을 기렸다. 소공은 주나라 초기 때 4대 왕을 보필하며 정국을 안정시켰던 인물이다. 백성들은 ‘동방의 소공’이라 황희를 칭송했고 그가 쉬었던 자리에 존경의 뜻을 담은 것이다.



이후 충청, 전라, 경상, 경기좌도의 백성들이 가뭄으로 고통을 호소하니 그해 납부 재목을 모두 탕감해 주고 양곡의 상납을 중지시켜 백관들의 녹봉을 적당히 감하게 해달라고 세종에게 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공물 제도는 합리적으로 개선해서 권내와 각 관청에 상납해야 할 공물 중에 도둑이 훔쳐 갔거나 파손되어 못쓰게 된 물품들은 더 이상 바치지 말도록 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또 경차관(敬差官)을 고을마다 순행하고 사찰하게 해서 굶주리고 굶어 죽은 백성들이 있다면 그 고을 수령 3품 이상은 장계를 올려 죄에 처하고 4품 이하는 법으로 즉시 처단시켜 백성들을 구제했다.



태종의 부탁으로 황희를 다시 등용하긴 했으나 그의 능력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세종은 강원도의 기근을 단기간 안에 해결한 황희의 행정력과 추진력에 깜짝 놀랐고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됐다.



황희 역시 정치적으로 왕을 모시는 충직한 신하로만 머물지 않았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견제하면서 세종의 왕권을 강화했고 왕의 뜻을 받들어 관료들을 화합시켰다. 또한 높은 수준의 학문적 통달을 근거로 예제와 법제를 확립했으며 전반적인 국정을 탄력 있게 운영하면서 해결점을 찾아내는 실천가로 역량을 발휘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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