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황희와 함께 청백리로 불리는 맹사성 (고불맹사성기념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사회나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에게 있어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누구를 만나고 함께 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일생이 한 국가의 역사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도 조력자 없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어떤 인재를 발굴해 내고 협력을 이끄는가에 따라 성공 여부가 달라진다.
지도자는 그 어떤 관계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엄격함을 가지고 인재를 등용하는 기본 원칙과 기준이 분명해야 할 것이다.
황희가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만인의 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특출난 능력을 알아보고 믿어주었던 왕의 안목 덕분이었다.
만약 왕들의 신망이 없었다면 황희의 무한한 가능성과 탁월한 실력은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벼슬을 등지고 본향인 장수로 낙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종은 “훌륭한 정승 한 명을 얻으면 나랏일은 가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을 만큼 황희라는 큰 인재를 얻었다.
황희 역시 왕이 자신을 알아봐 준 것처럼 조선의 발전을 이끌어갈 뛰어난 인재들을 알아보고 그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황희의 사람을 보는 안목은 세 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헤아릴 수 있다.
첫 번째는 태종 때 ‘목인해 사건’에 연루된 조용과 맹사성을 구한 이야기이다.
1408년(태종 8년) 세자의 사부였던 조용이 목인해라는 사람에 의해 역모 주동자로 몰리게 됐다. 김해 관노였던 목인해는 출세를 위해 어린 평양군과 조용을 역모죄로 엮은 후 고발해서 그 공으로 벼슬을 얻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평양군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으로 1402년(태종 2년)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와 혼인하고 평녕군에 책봉되었다가 1406년(태종 6년)에 평양군으로 다시 고쳐 봉해졌다.
목인해는 평양군이 예전에 장인이 부인을 불러 자기 과실을 말한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장인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번에는 주모자인 조용과 함께 역모를 꾀해 왕실을 위협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변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은 크게 분노했고 황희를 황급히 불러 “평양군이 모반에 가담했으니, 병력을 모아 사고에 대비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황희는 침착하게 일을 꾀한 자가 누구인지부터 물었다. 태종이 조용이라고 말하자 “조용은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할 사람이 아닙니다.”라면서 편을 들어주었다.
평소 조용은 성리학을 비롯해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20여 년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지내며 인재 양성에 힘쓴 인물이었다.
바로 평양군과 목인해를 붙잡아 대질하니 목인해의 계획이었음이 드러났고 조용의 무고함도 밝혀졌다. 범죄가 발각된 목인해는 죽임을 당했다.
조용의 편을 잘못 들어주었다가 황희도 역모죄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인데 평정심과 분별력을 잃지 않았던 그의 식견이 놀랍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을 믿어주었던 황희의 은혜에 감복한 조용은 평생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당시 평양군의 죄를 심문했던 사헌부 대사헌 맹사성은 이 사건으로 태종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황희는 맹사성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하면서 “작은 나무 기둥 하나를 얻으려 해도 십 년을 넘게 키워야 하듯 훌륭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재는 한 번 잃기는 쉬우나 다시 얻기는 어렵습니다.”라고 말하며 왕을 만류했다.
그러나 태종의 화가 쉽게 풀리지 않자, 이번에는 승정원의 관원들을 시켜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모두 걷어 내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이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정직한 신하를 죽여 없앤다면 승정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크게 깨달은 태종은 “경의 말이 옳다.”면서 명을 거두고 맹사성을 살려주었다.
맹사성은 뛰어난 업무 능력과 청렴함으로 황희정승과 함께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만약 이 사건으로 그를 잃었다면 크나큰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황희와 맹사성이 함께 수록된 기사만 266건이며 그중 222건은 세종대에 기록된 것이다. 두 사람은 경쟁자이자 조력자로 국정을 다스리며 조선의 발전을 꾀했다.

장영실이 발명한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천문기구 혼천의 (나무위키에서 캡처)
두 번째는 장영실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알려진 장영실의 부친은 원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기녀들은 천민으로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따라 아들도 관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비 출신이었음에도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태종 때부터 궁중 기술자로 종사하면서 제련, 축성, 농기구, 무기 등의 제작과 수리를 맡았다.
1421년(세종 3년)에 중국으로 유학해서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온 장영실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정5품 상의원 별좌로 임명되었다. 상의원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별좌는 월급이 없는 문반직이었으나 관노로서는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자격루의 발명으로 세종이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주려고 하자 대신들의 반발이 컸다. 이때 황희가 태종이 평양의 관노였던 김인의 날래고 용맹함을 알아보고 호군에 제수한 예를 들면서 장영실이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것에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적극적으로 천거했다.
황희의 관용과 지지에 힘입은 장영실은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천문기구 혼천의(渾天儀)를 만드는 등 정4품 호군, 종3품 대호군까지 오르며 조선시대 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황희의 일화 중 하나로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황희의 친구가 고아인 사내아이 한 명을 데리고 찾아와 갈 곳이 없는 아이라며 노비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이의 용모와 행동에서 총명함을 본 황희는 노비 신분을 풀어주고 멀리 보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년 뒤 황희가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있을 때, 장원급제한 사람이 그의 앞에 와서 공손히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하는데 바로 그 아이가 아닌가.
사내가 지난 사연을 말하고 감사함을 전하려는 그때였다. 황희가 사내의 입을 황급히 막고 모른 체 하는 것이었다. 혹여라도 노비 신분이었던 사내의 과거를 들킬까 염려해서였다.
황희는 그를 따로 불러 말하기를 “다시는 나를 아는 척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정진해서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에만 노력하라.”며 당부했다고 한다./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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