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수행과 인고의 반복 '수심화(修心畵)'에 마침표를 찍다

한국화 대가 정승섭 화백 별세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11월 27일 12시55분

우리 시대 최고의 수묵화 거장 현림(玄林) 정승섭(鄭承燮)화백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기와집과 솔과 설경은 현림 그림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림 속의 청청한 솔은 추사의 '세한도'를 연상시킨다. 사랑채에 앉아 설경을 응시하고 있는 저 노인은 아마 화가의 분신이거니…. 화가로부터 설명을 들은 탓인가.

그림으로 부터 밝고 신령스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솔과 고가(古家) 그리고 여백까지도 화가의 내면속 언어로 다가온다.

진정한 예술미의 진수는 끊임 없는 자기 수행과 인고의 부침 속에서 발아한다는 신념 하에 도(道)의 성취를 화업으로 삼고 창작에 몰두해 온 그는 설경을 중심으로 한 주옥같은 수묵산수의 세계를 펼쳐보였다.

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정 화백의 수심을 반영한 결정체이자 수행의 실상에 다름 아닌 한결같이 고요하면서도 맑은 기운의 선기로 충일돼 있다.

설경을 수묵화의 본질적인 의미 현현에 가장 적합한 소재로 사정해 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정결함과 함께 모든 색을 포용하고 모든 색을 비우는 흰색을 바탕으로 충만함 가득한 선경의 경지를 선보이고 있다.

설경에서 돋보이는 먹의 생략과 묵시적인 분위기들이 잘 드러나 있다.

화선지와 수묵이 지난 물성과 주제가 매우 적절하게 부합함은 물론 그런 작업활동의 이면에는 오염된 세속의 풍진을 떨쳐버린 채 낙원을 향한 바라밀의 세계를 그려보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노경의 세계에 접어든 그는 “일종의 무법지법(無法之法)의 단계에서 마음이 가는대로 자유롭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현림은 작가의 창작 활동과 인격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참다운 예술미의 진수는 끊임없는 자기수행과 인고의 반복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림은 그림이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말한다든가 또는 '그 사람 인격은 개떡 같은데 작품은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따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술의 술(術)자가 '재주부린다'는 뜻이 있긴 해요. 하지만 재주부리는 것만으로 그림이 완성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일찌감치 졸업했어요.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그림에 혼을 불어넣는 작업입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한마디로 '수심화(修心畵)'라고 표현했다. '마음닦는 그림'이다. 미술작업은 그에게 혼령과의 대화이며 자기수행이고 화실은 마음을 닦고 도를 구하는 도량이다.

현림은 화실에 머무는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붓을 잡지 않는 시간일지라도 화실에서 이리 저리 뒹군다든가 고요하게 선정에 들면서 마음을 맑히고 이 마음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에게서 가장 좋은 그림이란 혼령이 가장 밝고 청명할 때 나온 작품이다. 반면 좋지 않은 그림은 혼이 빠져 있고 기교만 부려 나온 작품이다.

현림은 40여년동안 작품 생활을 했다. 그동안 작품 세계는 크게 두 번 바뀌었다. 처음 20년은 인물화를 그렸고 그 후 20년은 산수화를 그렸다.

손청문 미학박사는 “전반기 20년은 인물화에, 후반기 20년은 수묵산수에 몰입한 정화백은 종교적 분위기에 심취, 이상세계, 즉 선경의 경지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기대된다”고 했다.

원광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작 ‘백두산천지’는 합작품으로, 현림 정승섭화백과 김삼룡박사의 시, 그리고 여산 권갑석 선생의 한글 서예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림 정승섭화백이 문방사우를 그리고, 월전 장우성선생이 난을 치고, 여산권갑석선생이 한자로 제(題)를 했던 대작 ‘부작란(不作蘭)’ 기명절지도를 보면, 특히 이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전통적인 수묵담채화로 먹과 물의 조화만으로도 깊고 풍부한 선을 살려내는 그는 300호 작품 '대흥사의 겨울'은 선 하나에서부터 전체 균형을 받쳐주는 여백에 이르기까지 오직 일념으로 작품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마이산의 전설', '모악산의 추경', '약초 캐는 노인이야기' 등도 200호가 넘는 대작이다.

영산성지 영모원에 있는 '십상도(十相圖)'는 인물화시대가 끝날 무렵에 그린 것이고 원광대 본관에 걸려있는 그림은 이 대학 교수에서 정년 퇴임을 하면서 그려놓고 온 산수화다.

그는 1940년 강원도 평강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회화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2006년 원광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 원광대 박물관장, 미대학장, 미술관장을 맡았다. 2007 전북도립미술관 등 개인전 12회를 한 것을 비롯, 독일 프랑크푸르트 에서 '한국예술세계전' 등 다수의 단체전 및 초대전을 했다.

1962∼1980년 국전 특선 3회, 입선 10회를 했다. 대한민국 옥조근조훈장, 겸재미술상, 전라북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원광대 명예교수로, 전주 대성동에 있는 '수월송풍헌'이라는 화실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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