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연로한 대신들에게 내렸던 궤장-- 나무위키에서 캡처
왕의 안목으로 조선이 황희를 얻은 것처럼 황희 역시 사람을 보는 지혜로움으로 신분과 관계없이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 뛰어난 인재들을 등용했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계급과 신분 사이의 ‘갑을관계’는 변함이 없고 천대받고 차별받는 계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불법과 불평등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법규와 사회 제도를 보완해 가고 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
신분제가 철저했던 조선시대에 차별 없이 인재를 선발했던 황희의 안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32년(세종 14년) 5월 14일, 황희는 재능이 있는 뛰어난 인재를 부모가 지은 죄로 인해 벼슬에 제한을 두는 것의 부당함을 진언했다.
그는 “옛사람들이 사람을 쓰는 것은 계통이나 친족의 일에는 구애하지 않는 것이 오래입니다. 비록 장리(뇌물이나 횡령으로 죄를 범한 관리)의 자손일지라도 진실로 현명하고 재능이 있다면 써야 할 것인데 정부·육조·대간의 벼슬은 제한하고 군 관직으로만 써야 하겠습니까. 또 한계를 정하여 놓고 쓴다는 것은 사람 쓰는 도리에 도량이 좁다고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벼슬의 제한과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조부나 아버지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그의 자손들이 무고하게 처벌당하고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게 연좌시키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문제점을 알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좌제가 폐지된 해는 1894년 갑오개혁 때로 “죄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금지한다.”라는 규정이 생긴 이후부터다. 그러나 군부독재 정권 시절까지 이어져 왔던 연좌제 악습의 폐단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황희의 시대를 앞선 인권 존중 의식이 놀랍다.

황희 선생 영당지(경기도기념물 제29호): 황희 선생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적합한 인재를 발굴하고 천거하는데 신분을 가리지 않는 평등함을 강조했던 그는 맹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등 장애인을 비롯해 천인이라도 고위 관료가 될 수 있다며 모든 사람에게 출사를 열어주었다.
후에 문종은 사람을 잘 알아보는 황희의 식견 덕분에 귀한 인재를 많이 발탁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세종이 관료들과 수많은 국정 과제들을 논의할 때마다 결론은 대부분 “황희의 뜻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왕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그의 풍부한 식견을 믿었고 오랜 관직 생활에서 경험하고 이루어 낸 성과를 잘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관료들과의 마찰을 조정하고 화합을 이끄는 리더십으로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임새 있게 등용하는 안목을 높이 샀다.
왕의 든든한 뒷배가 있었음에도 결코 오만하거나 편협하지 않았던 황희는 자신을 믿고 뜻에 따라주었던 왕의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유연함 속에서도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않으며 충성으로 왕을 보필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정년 나이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70세가 넘으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70세가 된 황희도 늙고 병듦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한다. 그러나 세종은 늙으면 물러나야 하는 일반 규정을 황희에게만은 예외로 두고 병을 치료하면서 그대로 공무를 보라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종실록》 1432년(세종 14년) 4월 20일 기사를 살펴보면 황희를 향한 세종의 신망과 존경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경은 덕과 그릇이 크고 두터우며 지식과 도량은 침착하고 깊어 큰일을 잘 결단하고 나라의 법규에 대해 매우 밝아 태종에게 신임을 받아 승지에 복무하고 곧이어 가장 신임하는 중신의 위치에 두었다.”라면서 “아름다운 문채는 국가의 빛이 되었고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삼사를 밝히니 진실로 나라를 다스릴 만한 그릇으로써 모든 관원을 바른길로 이끌었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경은 나이가 아직 8, 90세에 이르지 않았고 병도 치료할 수 없을 만큼 굳지 않았다. 기운과 힘이 오히려 굳세어서 서정을 균평하게 하는 임무를 충분히 담당할 수 있으며 만약 병이 일어난다면 마땅히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될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덧붙여 “내가 의지할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겸손한 생각을 누르고 속히 직위에 나아가기를 바라노라. 더욱 덕이 적은 나를 도와 대업을 지켜 가지게 하는 방법을 꾀해야 하니 사직하려고 하는 일은 당연히 윤허 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붙잡았다.
5일 뒤 세종은 황희에게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궤장(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그릇’, ‘국가의 주춧돌’, ‘과인의 팔과 다리’라는 찬사를 보내며 결코 황희를 놓아주지 않고 곁에 두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439년(세종 21년) 77세가 된 황희가 또다시 사직을 표하자, 당시 도승지였던 김돈에게 세종이 황희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물었다.
김돈은 “신이 보기에 귀가 좀 어둡기는 하나 정신이 혼미하지 않고 도덕과 지량은 여전합니다. 비록 늙어서 허리가 구부러졌으나 벼슬을 그만두는 것은 마땅치 않고 집에서 큰일을 처리하게 하면 좋겠습니다.”라고 아뢴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황희의 뜻을 왕뿐만 아니라 신하마저 거부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조선시대만 해도 백성들의 평균 수명은 35세였고 양반들의 평균 수명은 보통 50~56세였다고 한다. 황희가 70세까지 장수한 것도 대단한데 편안한 노년 생활의 여유조차 즐길 수 없었던 고단함이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현재 우리나라 정년 나이는 직업과 직급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공무원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볼 때 60세이다. 그러나 2023년 기준 잡코리아와 알바몬에서 조사한 결과 60세까지 일하고 싶다는 직장인들의 희망 은퇴 나이와 달리 체감하는 은퇴 나이는 53.4세로 7년 정도 차이가 발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인들의 고용 불안감과 정년 나이조차 훌쩍 넘긴 황희는 결국 고용주인 세종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현직으로 복귀했다. 이쯤 되면 태만해질 법도 하건만 전과 같이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조선의 부흥기를 이끌었으니, 그의 정신력 또한 따라올 자가 있을까 싶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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