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종친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고 법의 공정함으로 죄를 묻다

12회 예외를 두지 않는 공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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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소통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황희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여론의 중요성과 공정함을 강조했다가 임금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406년(태종 6년) 태종과 겹사돈이었던 이거이와 그의 아들 이저가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 태종은 이들을 크게 벌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저를 다시 서울로 소환해 품계와 관직을 회복시켜 주라고 명했다. 대간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태종은 문을 닫아걸고 대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신사로 있었던 황희는 “임금의 말과 행동은 후대까지 전해지는 것인데 언론을 막고 대간들의 상소를 읽어 보지도 않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면서 태종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



법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예외를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황희의 원칙 중 하나였다.

1430년(세종 12년) 세종이 종친이었던 혜령군 이지가 도의에 어긋나고 교만과 방자함이 지나쳐 이를 논의하자 황희는 “종친도 법을 어기면 마땅히 엄하게 금지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직첩을 거두고 출입을 금해 그의 집에만 있게 했다가 허물을 고치거든 그때 관작과 봉록을 돌려주면 됩니다.”라고 고하며 법의 공정성을 강조했다.

이후에도 종친들을 우대하는 것을 반대하며 “종친들에게 친한 연고를 들어 벼슬을 주는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종친 중에 재능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같이 서용하고 재주가 없으면 작을 준 뒤 시골에 물러가 살게 하면 됩니다.”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태조의 손자 이원생이 송유경, 정천보의 꼬임에 빠져 반역죄에 연루되자 이원생을 풀어주려는 세종의 뜻에 반대했다. 비록 직접적인 죄를 범하지는 않았으나 태조의 왕명을 위조한 죄를 인정에 이끌려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며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진언했다.



1425년(세종 7년) 황희도 뇌물 사건에 연루돼 찬성과 사헌부 직에서 파면당한 적이 있다. 당시 관리들 사이에서는 뇌물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도리어 주는 것을 받지 않는 사람이 놀림을 당할 정도로 그 폐해는 심각했다.

세종은 관가의 물건을 공공연하게 뇌물로 주는 것을 태연하게 여기면서 죄라고 여기지 않는 관리들을 중징계하기 위해 쌍벌죄를 적용했다. 전에는 뇌물을 준 사람만 처벌했다면 뇌물을 준 자와 받은 자 모두를 처벌하는 쌍벌죄로 뇌물 풍토를 근절시키고자 했다.



사헌부에서도 세종의 뜻에 따라 “뇌물을 일절 엄금하고 법을 어기고 주고받는 자 모두 청렴하지 아니한 죄를 다스려 모두 다 장물로 계산하고 율에 따라 죄를 판정해서 선비의 풍습을 엄격히 하겠다.”고 아뢴다.

세종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부정부패를 막을 수 있는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 적임자로 황희를 지목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세종이 제정한 뇌물 쌍벌죄를 받게 된 첫 사건의 당사자가 황희가 된 것이다.

오랜 관습처럼 뇌물을 받아온 수많은 관리가 사건을 은폐하고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황희만 남원 부사 이간이 보낸 유지 안롱(鞍籠 수레나 가마를 덮는 우비의 하나)을 받았다고 자수했다. 결국 황희는 찬성과 사헌부 직에서 파면당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정직함을 칭송했다.



황희의 공정함은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뽑힌 하위지 답안지 사건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435년(세종 17년) 태조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왕실의 절 흥천사의 사리각이 기울고 위태하니 세종이 수리를 명했다.

이에 숭유억불 정책에 어긋난다며 대간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세종은 태조가 세운 사리각을 무너지게 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3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438년(세종 20년) 공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해 4월 과거시험에서 대간의 자질에 관한 문제가 나왔고 사리각 수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하위지의 답안이 장원으로 뽑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위지는 흥천사 공사로 인해 수만 재민을 구황할 수 있는 반년 식량에 해당하는 막대한 비용 손실이 생겼다면서 당시 조정의 대간들이 이를 막지 못함으로써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판예조사(종1품)로 있던 허조는 하위지의 답안지를 읽고 “언관의 책임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보면 부끄러울 것이다. 이 한 조목은 간관들의 병통을 적중해 찌른 말이다.”라며 감탄했다.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수장으로 있었던 황희 역시 세종이 추진한 일에 대해 비판하는 하위지의 답안을 장원으로 선발했다.

대간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하위지의 발칙함으로 권위가 떨어진 것에 대해 분노하며 단체로 사직을 청했으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리각 수리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던 영의정 황희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면서 국문을 청했다.



하위지의 답안은 황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대간들은 장원으로 뽑은 황희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로 급급했으나 공과 사가 분명했던 황희는 패기와 실력을 갖춘 하위지를 뽑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실책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하위지를 장원으로 뽑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세종은 “위지의 대책문에 대간들의 그릇된 점을 밝히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 주장한 글을 보고 이를 잘못으로 생각하기보다 도리어 칭찬하고 상제에 둔 것은 그 의중과 처사가 상위하다.”라면서 황희의 편을 들어주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에게 대책을 묻는 것은 장차 바른말을 숨기지 않는 선비

를 구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니 비록 과인의 과실을 극구 평론했다 하더라도 그 말이 만약 적당한 것이라면 마땅히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타당성을 밝히고 하위지를 집현전 부수찬(종6품)으로 제수했다.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그 허물에 대해 비판했던 하위지를 장원에 올린 황희의 공정함은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사진 첨부

사진1. 사헌부 그림(나무위키에서 캡처)

사진2. 황희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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