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사위 서달의 죄를 무마하는 등 비리와 부패로 관료들의 질타를 받았던 황희

13회 인간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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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황희정승 초상화



황희는 모든 일에 그릇됨이 없이 정당함을 실천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인간적 한계에 부딪혀 청탁 사건에 휘말리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사위 서달의 죄를 청탁한 일이다.

1427년(세종 9년) 6월, 형조판서 서서의 아우이자 좌의정 황희의 사위인 서달이 한양에서 어머니 최씨를 모시고 충청도 대흥현(지금의 예산 대흥면)으로 가는 길에 신창현(지금의 아산 신창면)을 지날 때였다.

그 고을 아전이 자신에게 예를 다하지 않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서달은 잉질종 등 세 사람을 시켜 아전을 잡아 오라고 명했다. 그 과정에서 아전 표운평이 심한 매질을 당했고 이튿날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표운평의 가족들은 이 사건을 관찰사에 고소했고 국문하게 되었다. 사실을 알게 된 황희는 신창현이 고향인 판부사 맹사성에게 사위를 그 아전 집과 화해시켜달라고 청탁한다.

맹사성은 표운평의 형 복만을 불러 “우리 신창 고을의 풍속을 아름답지 못하게 하지 말라”며 힘을 좀 써달라고 부탁했고 신창 현감 곽규에게 서신을 보내 잘 주선해달라고 전하며 황희를 도와주었다.

뇌물까지 받은 표복만은 아우의 집에 찾아가 표운평의 아내에게 합의를 종용해서 합의서를 신창 관아에 바치도록 했다. 조사를 맡았던 조순과 이수강은 조서를 뒤엎어 서달은 면죄하고 잉질종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관찰사에 보고했다.



관찰사의 보고는 내막이 감춰진 채 형조에 그대로 옮겨졌고 의정부까지 보고되었다. 그러나 소송의 조서를 읽고 의심하게 된 세종은 의금부에 일러 다시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고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탁한 황희와 맹사성 두 정승은 파면당했고 3명이 귀양을 가는 등 총 15명이 중벌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사건의 주범인 서달은 집안의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했고 재물로 죄를 감면받았다.

거기다 세종은 열흘이 지나자 다시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대간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특히 이맹균 등은 “서달을 구원하고자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죄가 있는 사람에게 죄를 면하게 하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 황희와 맹사성을 수십일도 되지 않아 그 지위를 회복하라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상소했다.

서달 사건의 결말은 세종과 황희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에 이끌린 사사로운 감정으로 위엄은 무너졌고 관료들의 신뢰를 잃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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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표준 영정(나무위키에서 캡처)



태석균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1430년(세종 12년) 제주 감목관으로 있었던 태석균이 국가 소유의 말을 관리하는 것을 소홀히 해서 천 마리나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물지 않고 그대로 관직을 유지하면서 녹봉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좌의정으로 있던 황희는 법을 집행하는 이심에게 “태석균의 죄는 용서해도 된다.”라고 청탁해 빼내 주려고 했다. 이를 안 사헌부는 정권을 쥐고 있는 대신이 몰래 해당 관청과 개인적으로 청탁한 죄를 물어 황희의 직책을 파면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사헌부의 말이 옳으나 경솔히 벌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사헌부가 다시 상소를 올려 황희를 공격했다.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년) 11월 24일 기사를 보면 “지난번에 황희는 그의 사위인 서달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이수강, 곽규 등과 내통하여 죄 없는 사람에게 화를 끼칠 뻔했다가 일이 발각되자 이수광과 곽규 등이 모두 잘못을 자백했습니다. 전하께옵서는 황희가 대신이기 때문에 죄를 다스리지 않고 특별히 복직을 명하셨습니다. 그 은혜가 지극히 넓고 두터운데 마땅히 송구한 태도를 고치어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또 태석균의 문제를 이심에게 부탁했으니 이는 황희로 인하여 법을 굽히게 하는 것입니다.”라며 반발했다.

이어서 “전하께서는 대신으로 황희를 대우하셨는데 황희는 대신의 도리로 전하께 보답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관직에 머물러 있기를 명하시더라도 황희가 무슨 낯으로 조정에 서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겠습니까. 또한 대신의 권한을 잡은 사람의 청탁을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라며 황희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사헌부는 아무리 왕의 명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른 황희가 염치도 없이 조정에 남는다면 그를 존경하고 따를 사람이 있겠냐고 되물으며 스스로 물러나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면 권력을 가진 자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것으로 권력자의 힘은 더욱 강해질 것을 염려했다.

결국 사헌부의 상소를 무시할 수 없었던 세종은 황희를 파면한다. 거기다 다음 해인 1431년(세종 13년) 전 내섬주부(內贍主簿) 박도라는 사람이 관가의 둔전을 황희와 그의 어머니 김씨에게 주었다는 혐의까지 더해져 황희의 권위는 더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도 세종은 태석균의 일은 의롭지 못한 것이라 인정하지만 둔전을 받은 일은 밝히기 애매하다며 황희의 편을 들어주고 영의정에 올린다. 69세였던 황희는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뜻을 받들어 올바른 국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희뿐이라는 세종의 절대적 신임은 흔들리지 않았다.



황희는 관직에 있는 동안 비리나 부패에 연루되어 비난받은 경우가 여러 건 있었다. 주로 가족, 친인척 비리나 부패 그리고 그것의 변명으로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황희의 정치적 약점이 되어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세종의 포용력이 아니었다면 결코 관직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황희 편을 들어주었던 세종의 선택은 편파적이었지만 황희를 얼마나 의지하고 곁에 두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의 관대함으로 여러 번 위기를 모면했던 황희는 자신의 허물을 덮을 만큼 더 많은 치적을 남김으로써 조선의 명재상이 될 수 있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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