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신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제도를 시정하고 대책을 마련하다

14회 노비, 천민, 죄인까지도 배려했던 복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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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방촌황희선생문집(2001년, 방촌황희선생간행위원회)



고려시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부모의 음덕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던 음서 제도 혜택을 받은 황희가 얼자 출신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얼자란 어머니가 천인이고 본처가 아닌 첩의 자식으로 양인인 첩의 자식 서자보다도 서열이 낮은 신분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이 얼자 출신임을 밝혔던 황희가 가장 높은 관직까지 어떻게 오를 수 있었을까?

고려시대에는 적자, 서자, 얼자 차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권한이 컸었던 고려시대에는 남편이 처가살이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도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일부일처제가 일반화되어 첩을 들이는 경우가 드물었던 당시에는 차별이 심하지 않았고 서자와 얼자도 벼슬에 오르는데 특별한 제한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들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구실로 첩을 들이기 시작하더니 거의 모든 양반이 첩을 들였고 본처와 첩의 신분 차별과 규제도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다행히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살았던 황희는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있었고 자손까지 관직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백성은 하늘이 내려준 귀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황희는 노비와 천민을 위한 복지정책도 잊지 않았다. 그는 1414년(태종 14년) 6월 27일, 관청 및 개인 여종이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 해달라고 임금께 간곡히 청하며 천첩의 소생이 부역을 면하게 하는 법은 따로 없으니, 아비가 양인인 경우에는 아들도 양인이 되게 하는 종부법 실행을 태종에게 건의했다.

태종 역시 황희의 말이 옳다면서 “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이 없었다. 전조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천인인 어미를 따랐기 때문에 천인은 날로 증가하고 양인은 날로 줄어들었다. 영락 12년 6월 28일 이후 공사 비자(여자 종)가 양부에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아울러 모두 종부법에 따라 양인을 만들고 전조의 판정 백성의 예에 의하여 속적(屬籍)하여 시행하라.”고 명했다.



그 당시 천인인 어머니와 양인인 아버지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어머니를 따라 천민 신분으로 부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부당함을 진언했고 자식이 천민이 아닌 양인으로 살 수 있도록 노비종부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또 공사의 여자 종이 출산하게 되면 산후 100일 동안 노역을 면제해 주는 법령도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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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황희선생문집 내용 중 ‘신백정의 조처하는 방법을 아뢴 장계’



천대받는 백정에게도 신분 때문에 부당함을 당하지 않고 생계를 이을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고 추진했다.

조선시대 노비보다도 더 천한 대접과 차별을 받았던 백정들은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누명으로 폭행과 죽임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남자는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끌려갔고 상투를 틀 수 없었으며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고 가마도 탈 수 없었다.

귀화한 유목민으로 정착이 힘들었던 백정들은 결국 떼를 지어 떠돌아다니면서 도둑질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기피 대상이었고 천대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였다.



황희는 각 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경내에 있는 백정들을 모아 각 동리에 나누어 배치하고 적당한 토지를 주고 정착하게 했다.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이 있는 자를 보수자로 골라 보증을 맡기고 그 동리의 이름, 인구 및 보수자를 기록해서 매달 돌아다니면서 살피고 엄중하게 조사한다면 더 이상 떠돌며 도둑질하지 않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여겼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천민 백정들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선도하려 했던 황희는 그들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마음을 쓰지 않는 수령이 있다면 그 죄를 묻겠다면서 백정들을 보호했다.



신분과 관계없이 죄인의 인격도 존중했던 황희는 매로 죄를 다스렸던 태형 중에서 등을 치는 태배법(笞背法)은 장기를 다치게 한다며 엉덩이를 치는 태둔법(笞臀法)으로 바꾸는 등 형을 무겁게 주는 것을 반대했다.

형벌을 가볍게 줌으로써 실수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억울한 형벌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무거운 형벌을 반대한 데에는 집안 여종의 억울한 자백을 경험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황희의 부인 양씨가 좋은 배 몇 개를 얻게 되었다. 양씨는 황희에게 주려고 현판 뒤에 배를 숨겨 놓고 잠시 친정에 갔다. 집에 돌아온 황희가 내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현판 뒤에서 쥐가 자꾸 들락거리면서 배를 훔쳐 가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됐다. 그런데 쥐가 크고 매끄러운 둥근 배를 가져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쥐가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는데 다른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한 마리가 배를 안은 채 벌렁 드러눕더니 다른 한 마리가 배를 안고 있는 쥐를 물고 구멍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두 마리 쥐는 배를 몽땅 훔쳐 갔다.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온 양씨는 배가 없어진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어린 여종을 추궁했다. 아이가 처음에는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서너 차례 세게 매를 맞더니 자기가 훔쳐먹었다고 울면서 자백했다.

황희는 어린 여종이 죄 없이 억울한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거운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한 억울한 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세종에게 고해 온갖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고 생명까지 잃게 하는 혹독한 고문의 문제점을 알렸고 그 시절 친족관계인 사람까지 연좌시켜 책임을 물게 하는 제도를 시정했다.



또 70세 이상의 노인이나 15세 이하의 어린 사람이 가벼운 죄를 저질렀을 때는 옥에 가두지 못하게 했고 80세가 넘은 노인과 10세 이하의 어린 사람은 비록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옥에 가두는 것을 금했다.

당시에는 종이 잘못을 저지르면 주인이 종을 때리거나 죽여도 주인은 처벌받지 않았다. 이런 잘못된 관행을 없애고 종도 심문받고 정당한 처벌을 내리게 해서 주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생명을 보호했다.

한편 죄인이 고문에 시달리고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치료도 받지 못해 죽게 하는 관리가 있다면 즉시 관두게 하고 근무 상태를 조사해 성적을 매길 때 참작하겠다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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