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정책과 노인복지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다

15회 교육진흥책과 노인복지정책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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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성균관 내 교육 공간이었던 명륜당-->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 갈 훌륭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황희는 학교설립과 교육진흥책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먼저 조선 최고 유학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열악한 시설들을 보수, 확충하고 유생들을 증원해서 육성시켰다.

조선 초기 성균관은 유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문 전당의 기능과 유학 이념에 근거해 관리를 양성하는 관리양성소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지배사상과 관료 체제를 재편성하고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황희는 조정 신하의 자손들을 모두 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게 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성균관에 입학시켜 경서를 연구하고 예도를 배워 학문 진흥에 힘쓸 것을 장려했다. 성균관을 통해 훌륭한 인재들을 키워내 훗날의 쓰임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중요함도 강조했다. 1439년(세종 21년) 2월 2일 기사를 보면 “현명한 인재의 배출은 모두가 학교에서 말미암는 것이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에는 스승을 선택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얻게 되면 어린이들의 교양이 바루어져서 풍속이 아름다운 것이요,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어린이들의 교양이 바르지 못하여 풍속이 불미할 것이니 인재의 현(賢)·부(否)와 풍속의 미(美)·악(惡)은 모두 이에서 관계되는 것입니다.”라고 임금께 아뢴다.



학생들이 학문에 집중하려면 먼저 공부할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 했고 학생들에게 교양과 풍속을 가르쳐줄 능력 있는 선생님이 필요했다.

황희는 뛰어난 선생님과 학생들을 뽑아 지원해 줌으로써 사기가 높아져 더욱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또한 당시 교육문화의 불모지였던 접경 지역인 함길도에 새로 신설된 군마다 학교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도내에 학문 있는 자를 택해 학장으로 올리고 교사를 임용해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에 힘쓰도록 했다. 지역 간의 불평등을 없애고 모두가 교육 혜택을 받도록 조치한 것이다.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그는 외국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외국어 교육과 유학을 통해 인재를 육성해서 다른 국가와의 활발한 외교활동이 이뤄지길 바랐다.

1433년 9월 세종과 중국 유학생을 뽑는 문제를 논의할 때였다. 세종은 나이가 적고 총명하고 민첩한 자를 선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희는 나이만 보고 재주와 행실을 보지 않는다면 법도에 맞지 않는다면서 반대했다. 그의 나이 71세 때의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중장년의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창 일할 수 있는 체력과 능력은 있으나 젊은 세대에게 양보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쳐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문직이 아닌 일반 노무직으로 밀려나고 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여전히 현직에서 일하고 있었던 황희는 경험을 통해 나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과 가능성의 가치를 봐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실용 학문 발전에도 박차를 가해 음양학, 천문학, 의학, 음악, 수학 등 다양한 실용 학문을 육성하는 한편 당시 통역관을 외국인이나 변방 사람으로 여기며 무시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중국어, 여진어, 왜어(일본어), 몽골어 등의 외국어 교육 진흥책도 적극 마련했다.



여진어를 전공하는 역관 양성을 위해 북청 이북 지방 한 곳에 여진문자에 능통한 사람을 교사로 삼아 어리고 총명한 아이 10명을 선발해 날마다 수업하게 해서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중국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의 생도들을 요동으로 유학 보내 중국어를 배우게 했다.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학생들에게 영어는 이미 필수 과목이 되었고 대학생들의 유학이나 어학연수는 교육 과정 일부가 되었을 만큼 일반화되었다. 15세기를 살았던 황희의 시대를 앞선 교육정책은 그의 정치적 역량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리더십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노인들을 위한 황희의 복지정책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노인을 공경하고 우대하는 여러 시책과 제도를 시행하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예로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해 최소한의 의복이라도 지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진언한 것을 들 수 있다.

1439년(세종 21년) 1월 2일, “90세 이상의 노인으로 자녀도 없고 친족도 없어서 다른 집에 머무르며 밥을 얻어먹고 사는 자에게 사철 옷감을 준다는 것은 육전(六典)에 기재되었사온데, 지금은 단지 두 필을 주오니 편치 않습니다. 사철에 각각 포목 1필씩을 주고, 겨울에는 1필을 더 주기를 청하옵니다.”라면서 노인들의 건강과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폈다.



이 밖에도 세종의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경로우대 정책의 뜻을 받들어 노인들이 소외받지 않도록 힘썼다. 당시 80세가 된 노인들은 신분에 귀천을 두지 않고 나라에서 베푸는 양로연에 참석해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했다. 90세가 된 노인에게는 천인이라 할지라도 모두 쌀 2석(약 288kg)을 하사했고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연초에 쌀을 주고 매월 술과 고기를 주게 하는 등의 제도를 지지했다.

세종 때 조선시대 노인들이 가장 많았던 것도 그만큼 노인복지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가 고령화사회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2050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높은 국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23년 유엔(UN) 인권이사회는 “노인의 존엄과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노인의 모든 인권을 충분히 향유하고 장기 요양을 강화하며 그 질, 접근성 및 경제성에 대처하고 나이에 따른 차별에 대처하는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행동을 강화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노인 복지개선을 위한 정책들이 강화되고 있지만 경제력을 잃은 노인들을 바라보는 냉대와 멸시는 점점 더 깊어져서 또 다른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이 인권 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노인의 존엄성을 지켜준 황희의 진언과 행적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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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 경로당(진주옥봉경로당)->자료출처: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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