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자격루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이 가장 먼저 내세우는 공약이 민생 안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했을 때 정부는 ‘민생 안정 지원금’을 마련해 국민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자 노력했고 서민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물가안정 정책 발굴에 나섰다.
생계와 직결되는 민생 안정은 곧 국가 경제력의 지표가 된다. 그 대책 마련을 위한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이 어떻게 발휘되는가에 따라 국민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진다.
황희가 왕의 총애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민생 안정을 위한 정치적 역량이 월등하고 혜안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세종의 위대한 업적 중 큰 하나가 바로 공법 즉 토지 세금 제도 개선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세법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의 뜻을 받들기는 했으나 개정법이 나올 때마다 황희는 백성들을 위한 손익을 따져가면서 끊임없는 반대로 세종과 마찰을 일으켰다.
무려 17년 동안이나 공법을 혁신하는데 가장 많은 반대 의견과 개선 사항을 요구하며 논쟁을 거듭했던 황희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인해 가난한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 부담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세종이 처음 단행하고자 했던 공법은 중국 고대 하나라에서 시행했던 ‘중국식 공법’이었다. 이 공법은 풍흉에 상관없이 여러 해의 수확량을 평균하여 매년 똑같은 일정액의 조세를 징수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공법을 시행하면 풍년에는 걱정 없겠지만 흉년에는 반드시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을 살 것이 뻔했다.
이에 황희는 전지 몇 부(負)에 쌀 몇 말(斗)의 수량을 미리 정해서 추수기마다 각 도의 고을마다 농사의 풍흉을 살피고 비교해서 많음과 중간, 적음의 3등(等)으로 나누어 세를 징수하자는 연분3등제 의견을 내놓는다.
그 후 좀 더 보완된 방안으로 전국 8도의 토지 품질 비옥도에 따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고 각 전답이 상전·중전·하전 등의 전 품에 따라 세액을 정하여 과세하는 방법으로 3등도 3등전 공법이 시행되었다. 세율은 1결당 10 말부터 18 말까지 총 9단계로 상등도의 과세를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재해에 따른 조세 감면 문제와 공평성 등의 문제들이 생겨났고 수정을 거듭한 끝에 경무법에 따른 전분6등·연분9등 공법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 공법은 전답을 비옥도에 따라 6개 등급으로 나누고 1결의 면적을 계산해서 1차로 공평성을 실현하고 다시 그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9개 등급으로 나누어 1결당 20 말에서 4 말까지 차별을 두어 세액을 산정하는 2차 공평성으로 징수하는 제도이다. 각 토지의 조세 등급을 무려 54단계로 세분화한 형평성으로 백성들을 위한 공평 과세를 실현했다.
1428년(세종 10년)부터 1444년(세종 26년)까지 세종은 공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끊임없이 더 나은 대안을 모색했다. 과거시험에 “공법을 사용하면서 좋지 않은 점을 고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문제로 출제하기도 했고 5개월간 백성들의 여론조사와 황희를 비롯한 조정 신하들과 수년간 논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중에 신중을 기울였다.
백성들에게 더욱 공평하고 합리적인 공법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과 황희의 끈질긴 집념과 애민 정신에 갈채를 보낸다.
한편 황희는 백성들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 장영실이 발명한 자격루 설치를 적극 추진했다. 누구보다도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그는 궁중에 있는 자격루를 통해 정확한 시간을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그전까지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는 물시계였다.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표준 시계로 사용되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의금부에 있던 물시계는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에 종각을 두고 알림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시각에 맞춰 밤과 새벽으로 종을 치게 해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관리하는 사람의 출퇴근 시간이 정확하지 못했고 시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착오가 잦아 백성들이 불편을 호소했다.

정수루 신문고
황희는 병조장문(兵曹墻門)과 월차소행랑(月差所行廊), 수진방(壽進坊) 동구(洞口) 병문(屛門)에 집을 짓고 모두 징과 북을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궁중의 자격루 소리가 들리면 이것을 전해서 종을 치고 의금부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기존에 있던 물시계와 달리 자격루는 규칙적인 시간에 따라 종이나 북, 징이 울리고 나무 인형이 팻말을 들고 나타나는 구조로 획기적인 자동 시보장치였다.
이에 궁중의 자격루 소리를 듣고 징과 북을 쳐서 알릴 수 있는 곳을 여러 군데 설치해 백성들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모든 생활은 시간에 영향을 받는다. 시간 개념이 확실할수록 생활은 편리해지고 장기적인 계획도 가능해져서 미래를 예측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자격루 설치는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도 꼭 필요했지만, 궁궐에서 근무하는 호위병과 관리들의 업무교대 및 지각을 방지하기 위함이었고 무엇보다 전쟁 시 군사들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백성이 억울한 일을 하소연할 때 치게 했던 신문고를 허위로 치는 사람을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규례를 만들자는 사헌부의 의견을 반대하며 백성들을 보호했다.
사헌부는 신문고를 치는 사람들이 원통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사로운 일이나 무고한 사람을 신고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신문고를 치겠다”라며 상관을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황희는 “형벌을 써서 송사를 그치게 하는 것은 극약을 써서 병을 고치는 것과 같아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는 한이 있을 것이다”라면서 형벌이 무서워 신문고를 치지 못하는 백성들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생사가 오가는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 할지라도 힘이 없는 백성이 하소연할 수 있는 창구였던 신문고의 문턱을 높이는 것은 곧 백성들의 소리를 가려서 듣겠다는 말과 같았다.
황희는 억울하고 절박한 일에만 신문고를 치게 하고 그 나머지 세세한 일과 노비의 쟁송 같은 일은 사헌부에 공문을 올려 개정하게 하면서 신문고를 통해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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