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세종과 신하들이 업무를 보았던 경복궁 내 사정전--> 자료출처: 궁능유적본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세종은 수많은 정치, 경제, 행정, 군사, 교육, 외교, 문화, 예제 등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관료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통합하는 일과 임금과의 견해를 반영하고 조정할 수 있는 동반자로 황희를 선택했다.
황희는 1427년(세종 9년)부터 사회문화정책 중 가장 주목한 예제 정비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최고위직 제조로 활약한다. 의례상정소는 조선 초기 유교의 예법과 의식 등을 담당했던 특별기구로 국가의 의례, 법령, 정치, 사회 제도 등을 연구하고 제정하는 관서였다.
성현(聖賢)의 예를 규범으로 삼고 국가 기반을 바로잡기 위한 예제 정비사업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정책 사업 중 하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황희를 주축으로 맹사성. 이직, 정초 등이 참여해서 《오례의(五禮儀)》 정비와 교지, 조례를 모아 만든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 법전이 제작됐다.
《오례의》는 길(吉)·가(嘉)·빈(賓)·군(軍)·흉(凶)의 순서로 각종 국가 제례, 국가 및 왕실 경사 시 의례, 국빈 관련 의례, 군사 관련 의례, 국장이나 국상 등의 장례 의례를 모아 엮은 예서이다.
황희는 특히 왕실 제사의 허례허식을 없애고 백성들이 부담해 왔던 제사에 필요한 경비와 공물을 줄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그는 1398년(태조 7년) 태조 조부였던 도조의 비 순경왕후 박씨의 능을 옮겨 장사 지내려고 했을 때도 석양(石羊)·석호(石虎)·석실(石室)의 난간이 매우 사치하고 화려하니 검소하게 꾸며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경원교수관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경제속육전』은 백성들이 지켜야 할 사회규범을 정하는 법 개정인 만큼 정당성과 공정함으로 치밀하게 살펴야 했다. 한번 정해진 법과 제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자칫 잘못된 법을 악용하게 되는 관리가 생기고 임금마저 약한 의지로 수시로 법규를 바꾸려 한다면 큰 혼란과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백성들이었다.
법령의 정비와 법전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황희는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면서 재정립에 나섰고 드디어 1433년 새로 편찬한 법전을 세종에게 올린다.
《세종실록》 1433년(세종 15년) 1월 4일 기사를 보면 『경제속육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태조의 성덕이 천운에 닿아 나라를 이루었고 상신, 조준 등이 법을 모아서 이름을 ‘경제육전’이라 간행하여 백성들과 함께 이 법을 지켰고 태종 때 정승 하윤 등이 《속전(續典)》을 편찬하게 됐다고 밝힌다.
그 과정을 보면 의정, 이직 등이 하윤이 편찬한 것을 이어 옛 문서를 수정해서 세종에게 올리면 세종이 이것을 열람한 후, 부족한 점을 찾아 검토했다. 또 하윤·이직 등의 글과 이서에 실리지 않은 법령 조문을 자세히 살펴 채택하고 중복된 것은 버리고 번잡한 것은 줄여 《정전(正典)》 여섯 권을 만들었다. 또 일시에만 사용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법을 골라서 별도로 《등록(謄錄)》 여섯 권을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의례상정소는 중요한 의례·제도·정책들을 확정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 오다가 1435년(세종 17년) 폐지되면서 집현전이 그 일을 계승했다. 8년간 의례상정소를 지휘했던 황희는 예제 정비를 위한 자문을 이어가면서 중대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의견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1406년(태종 6년)에는 전국 사찰 12개 종파 중 7개 종파를 줄이고 사찰 수도 242개로 제한했다. 정책이 시행되면서 사찰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되어 국가 재정의 기반을 다졌고 향교를 짓는데도 충당되었다.
1442년(세종 24년) 황희를 비롯해 유교를 장려했던 신진 관료들은 세종에게 불교를 배척하고 승려들의 폐단을 막기 위해 도첩제를 강화하자고 청한다. 도첩제는 승려 신분을 소수에게만 인정해 주고 절에 속해 있던 승려들을 모두 양민으로 만들어 노동력을 높이고자 했던 방책이었다.
당시 승려의 수가 농민의 반이 될 정도였다. 세금이나 부역의 의무도 없이 농가에서 먹고 입는 것을 해결하면서 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승려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백성이 많았다.
황희는 승려들의 수를 철저히 조사했고 승려가 되고 싶은 자는 관의 허가를 받고 관아에 군포를 대납해야만 신분증을 발급받게 했다. 사사로이 승려가 된 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가족이나 관리들에게는 죄를 물어 처벌해야 한다고도 진언했다.
유교를 확립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황희는 불교와 관련된 현안에 있어서는 유독 반대 의견을 내세워 세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종교 갈등에 대한 문제도 있었지만, 승려들이 일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재산을 축내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거기다 화려한 불당을 짓고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는 것에 대해 국정을 운영하는 황희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1448년(세종 30년)에는 세종이 내불당을 설립하려고 하자 대간들과 함께 불당을 만들겠다는 명령을 회수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고 대간들의 거듭된 상소도 무시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세종과 황희의 신뢰 관계가 흔들릴 만큼 서로의 입장이 완강해서 팽팽히 맞서는 순간이었다. 숭유억불 정책은 재정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지만, 자칫 종교적 탄압으로 이어질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다.
황희뿐만 아니라 정부·육조 판서들은 물론 성균관 생원들까지 내불당 건립을 반대하고 나서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불만과 서운함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급기야 집현전의 신하들이 모두 직책에서 물러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에 세종은 황희를 황급히 불러 “시종이 모두 직책에서 물러났으니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난감해했다.
황희는 “신이 불러오겠습니다.”라고 아뢰고 나온 후, 왕의 의지를 꺾으려 했던 신료들의 집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설득에 나섰고 왕 앞에 무릎 꿇게 했다.
불교를 강하게 부정했던 황희였지만 세종을 향한 충심 또한 강했던 그는 왕과 신하의 협력적 관계를 융통성 있게 중개하면서 왕을 섬기고 돕는데 변함이 없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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