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1415년 명나라 영토--> 자료출처: 위키백과에서 캡처
조선시대 주변 국가들과 맺었던 외교는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이었다. 큰 나라는 섬기고 이웃과는 사귄다는 뜻의 사대교린은 명나라를 섬기고 예를 다하면서 여진족과 왜인에게는 교섭을 통해 이웃으로 잘 지내려던 정책이다.
먼저 명나라와는 양면 정책을 펼쳤다. 겉으로는 따르는 듯 보이면서 안으로는 실리를 꾀하는 책략을 썼다.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외교문서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던 황희는 사신들이 올 때마다 예의를 갖춰 그들을 영접하고 응대하면서 명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수립하는 정책들을 검토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청구하는 물품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애를 먹었다. 그로 인해 곤란한 일이 빈번하게 생겼고 명의 눈 밖에 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찾으려 고심했다.

독도 -->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1431년 7월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이란 환관이 방문했다. 윤봉은 황제의 권력을 믿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물론 온갖 추태를 부리며 민폐를 끼쳤다. 그는 동생 윤중부의 벼슬을 올려주길 바랐다. 6년 전 윤봉이 사신으로 왔을 때, 윤중부에게 벼슬을 내려 줬는데 이번에는 또 승진시켜 달라는 요구였다.
정사를 마음대로 움직일 만큼 권세가 대단했던 환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하는 것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황희는 세종의 뜻에 따라 일단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급하다고 판단해 윤봉의 제안을 받아들여 임시 조치로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았던 윤봉은 윤중부의 벼슬을 제 차례도 안된 등급으로 올려달라고 행패를 부렸다. 이번에는 황희가 강하게 관직 제수를 반대하고 나섰다. 윤봉의 공덕이 없으니 윤중부의 벼슬을 높여주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며 반발한 것이다.
합당하게 줄 수 있을 만큼만 내주되 지나침이 과하면 과감히 끊어낼 줄 아는 결단력으로 단호함을 보였던 황희는 노련한 외교술로 명과의 관계를 유연하게 대처했다.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이 평안도 서북면과 함경도 동북면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시로 경계를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황희는 이들에게 당근과 채찍 외교를 펼치면서 귀순해 오는 자에게는 벼슬과 선물을 주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가 하면 대항하고 백성들을 위협해 약탈하는 자들은 군사력으로 강하게 제압했다.
세종이 왕에 오른 뒤에 가장 막강한 국방력을 갖추게 된 조선은 영토 확장을 위해 여진족과 전쟁을 벌인다.
다섯 차례 야인정벌 책을 올려 토벌을 이끌었던 황희는 전쟁을 치른 후, 세종과 논의 끝에 야인들에게 회유책을 쓰기로 한다.
1433년 5월 3일 세종은 “파저강 야인이 오래전부터 본국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는데 이제 배은망덕하고 이유 없이 무리를 이루어 우리 변군에 돌입해서 인민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죄가 한도에 찼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한 것이다. 저들이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심으로 귀순하면 국가에서 반드시 처음과 같이 대우할 것이다.”라면서 알목하 야인과 여러 야인에게 알아듣게 타이르자고 말한다.
세종의 심중을 파악한 황희는 그들이 먼저 도발했으므로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보복하지 못하도록 정당성을 밝히는 한편, 뉘우치고 귀순하는 이들에게는 전과 같이 대우해 주겠다고 다독였다.
굶주림에 시달렸던 왜인들에게는 자비심을 베풀었다. 1435년 2월 대마도주 종정성이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떨어져 도와주기를 청하며 사람을 보내왔다. 이를 가엾게 여긴 황희는 쌀과 소주를 내어주자고 청하며 그들을 구제했다.
또 1441년 11월 21일, 왜인들이 우리나라 땅 고초도(孤草島)에서 고기를 낚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세종은 “우리나라에서 이웃을 사귀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의리는 옳다. 왜인이 고기 잡는 것으로 생활하니 그 생활이 가엾다.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곤궁한 형편 때문에 몰래 내왕할 것이고 허락하면 왜인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이익을 취하러 떼를 지어 올 것이니 화가 있을까 염려스럽다.”라면서 황희와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튿날 황희는 “그들의 생활이 곤란하고 두세 번 고기 잡기를 청하니 허락은 하되 배의 대소(大小)를 구분해서 허가 증명서를 주고 세를 바치게 함이 적당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만약 허가 증명서가 없거나 세를 바치지 않는다면 죄를 물어 세를 징수하기로 대마도주 종정성과 계약을 맺자”라고 아뢰었다.
그런데 이때 황희의 뜻을 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우의정 신개였다. 신개는 야인정벌을 주장하고 《고려사》를 펴낸 인물이다.
신개는 “대마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인데 고려 말기에 기강이 크게 허물어져서 도적을 금하지 못해 결국 왜적의 지역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 청을 들어준다면 저들은 반드시 고초도를 그들의 땅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사는 자가 있을 것이며 오랜 세월이 지나면 본국에서 무슨 이유를 대고 그들과 싸우겠습니까. 그러니 가볍게 승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간청했다.
신개의 반대에도 결국 세종은 황희의 편을 들어주었다.
자국의 이익도 중요하나 이웃 국가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지 못하고 지원해 준 황희의 박애주의는 높게 평가 받을만하다. 그러나 내 나라 영토를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신개의 애국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의정 신개의 우려대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야욕으로 굴욕의 식민지 시대를 견뎌야 했고 아직도 일본과 독도 영유권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현실은 일본이나 한국의 정권교체가 있을 때마다 정치적 도구가 되어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현재도 4년마다 한 번씩 개정되는 초·중·고 일본 교과서에서 일본의 가해 역사를 지우는 일은 강화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동원의 강제성은 점점 희석해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특히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독도에 관해서는 대부분 교과서가 ‘일본 고유 영토’라고 기술하면서 ‘한국이 독도 불법 점거’라는 부당한 영유권 주장으로 일본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본은 진실을 거부한 채 거짓과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한국의 뚜렷한 정부 대응 방침은 아직도 미비하다. 지금부터라도 단호하고 일관된 대응으로 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외교정책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된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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