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적의 침략에 대비한 방위 대책으로 국방력을 높이고 백성들을 보호하다

20회. 4군 6진 영토 확장의 숨은 공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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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군 6진 ---> 자료출처: 나무위키에서 캡처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막대하다. 수많은 목숨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며 복구되기까지의 피폐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국방정책들은 강화되고 있다.

특히 군사력은 국가 안보와 국제적인 입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전투력이 향상될수록 국제 무대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미국의 군사력평가기관 글로벌파이어파워(GFP)가 내놓은 2024년 국가별 군사력 순위에서 145개국 가운데 한국이 5위에 올랐다. 첨단 기술 보유와 강력한 군대, 한미 연합 지원을 바탕으로 높은 순위에 오른 한국은 지속적인 군사력 현대화와 국방력 강화를 통해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고 있다.

참고로 1위는 미국, 2위는 러시아, 3위는 중국, 4위는 인도, 6위는 영국이 차지했으며 북한은 36위에 올랐다.

글로벌파이어파워 군사력 평가 지수는 병력, 무기 수, 전시 동원 가능 인력, 국방 예산, 경제력 등 60개 이상의 개별 항목 지표를 활용해 산출한다.

전 세계인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강력해지고 있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방력에 놀라워한다. 분단국가로 여전히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함부로 침략할 수 없는 강한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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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 자료출처: 나무위키에서 캡처



황희 역시 국방의 힘을 키우고 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위 대책을 제시하고 추진하면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1428년(세종 10년) 황희는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어체계를 새롭게 구축했다. 평안도에는 대규모 병력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몇 겹의 방어선을 쌓아 올렸고 만약 적이 침입했을 때 백성들을 가까운 성으로 피신시킬 것을 고려해 성의 규모 파악과 군량을 마련하는 규정도 만들었다.

함경도는 여진족의 소규모 부대 침입을 대비해서 진을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국경선이 확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함경도에는 꽤 많은 여진족이 터를 잡고 있었다. 황희는 방어체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관직과 물품 등을 내려주면서 회유책도 펼쳤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막대한 비용과 백성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했던 신중함을 엿볼 수 있다.



포병 전력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화력의 강화는 곧 전투력과 직결되는 부분으로 화포 사용법을 배우고 익히도록 관장하는 화포시위군 설치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해상 방위 전략도 제시했다. 1429년(세종 11년) 광암량의 병선 5척 중 1척과 풍천량의 병선 4척 중 1척을 제사포로 옮기고 새로 배 1척을 만들자는 황해도 감사의 의견에 반대한다. 왜인들의 침입이 잦은 광암량과 풍천량에 허점이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고 병선을 또 만들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서였다.

황희는 큰 적군과 교전했을 때 장산곶 이북 포 병선과 이남 포 병선을 각각 한곳으로 모아 요충지에서 대응한 전례가 있음을 밝히며 실익을 고려한 방어책으로 왜적과의 해전에 대비했다.



1432년(세종 14년) 황희는 군사적 요충지인 용성(龍城)의 장항(獐項)·승가원(僧袈院)·요광원현(要光院峴) 등에 적의 침입을 방어할 책략을 세웠다. 먼저 경원(慶源)의 성을 용성으로 옮겨와 돌로 성을 쌓고 경성(鏡城)의 보도현(甫都縣) 이북을 분리해 덧붙였다. 길목에는 흙이나 돌로 성을 쌓고 사람이나 동물이 통하는 산등성이는 파거나 깎은 후, 그 바깥쪽에 구덩이를 파서 통행할 수 없게 만들고 경원의 통로 요관현에도 성을 쌓아 참호를 만들고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거기에 작은 보루를 만들어 적의 침입을 방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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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또한 군인의 포막(鋪幕)을 지어서 군인 수를 적당히 정하여 파수를 보게 하고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게 했다. 경원에 신설된 곳에는 임시로 벽성을 쌓은 뒤 군사상의 계략이 뛰어난 자를 선택해 경작할 만한 땅에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고 당번이 된 군대가 알맞게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군수를 보충하게 했다. 이는 군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묘책이었다.

지리적 요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성을 쌓아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설비부터 군사들의 식량 확보까지 치밀함을 보인 황희의 지략은 전문적인 지식과 식견이 없고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방어책들이었다.



그러나 여진족과의 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급기야 세종은 두 번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섰다.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한다. 이어서 1437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 장군이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고 평안도에 4군이 설치된다. 또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한 후,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구역이 6진이다.

세종은 이 지역에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영토를 확고히 지킬 수 있는 인구를 보충해 방어력을 높이고 선진 농법을 보급해 세금을 확보했다. 또한 그 지방의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제도를 실시하고 이주 정책을 따르는 천인에게는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설치한 4군 6진은 강을 경계선으로 여진족을 방어하는 것은 물론 국경선으로 삼아 북방 개척의 큰 의의를 두었다.



1441년(세종 23년) 황희는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지대에 군사 배치로 인한 주민 이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함길도로 경상도에서 600호, 전라도에서 550호, 충청도에서 450호를 이주시켜 살게 하도록 계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아낸다.

이 밖에도 군제 개편, 병기나 군수품 정비와 보충, 점검, 군관이나 사병의 근무 기강 확립, 군공을 세운 사람의 포상이나 대우, 병마(兵馬) 관리, 군관 사망자에 대한 제사 규정 등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국방정책들을 실행에 옮겼다.



흔히 4군 6진 개척의 공신으로 김종서를 떠올린다. 그러나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강화와 방어체계, 이주민 확보까지 4군 6진 개척의 상세한 대책을 설계하고 지휘한 사람은 바로 황희였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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