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조선시대 이상적 관료상 청백리로 관인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황희

21회. 청렴함의 모범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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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방촌 황희의 유물---> 자료 출처: 국가유산청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는 도덕과 윤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고 이를 실천하고 예의와 염치를 아는 것을 덕목으로 청렴함의 가치를 중시했다.

조선시대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청렴하고 강직한 신하에게 내려졌던 청백리라는 칭호는 후손들에게도 그 은덕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질 만큼 대단한 영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었다.



청백리라는 용어는 국가에서 선발해 뽑힌 관리를 수록한 《청백리안(淸白吏案)》 장부에 적힌 인물을 지칭했는데 작고한 관리가 뽑힌 경우는 ‘청백리’라고 하고 현직 관리가 뽑히면 ‘염근리(廉謹吏)’라고 불렀다. 청백리와 염근리를 뽑는 제도와 규정은 대체로 숙종 때 와서 정착되었다.

《청백리안》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조선 후기 순조 때에 홍경모가 역사와 고사를 정리한 《대동장고(大東掌攷)》에서 ‘청백리안’을 기초로 기록한 116명의 명단을 찾을 수 있다.

청백리 선발은 만연한 관료들의 탐욕을 억제하고 청렴함을 장려해서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닌 올곧은 정치로 민생 안정을 이끌었던 청렴한 관리의 생애와 업적들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칭송받았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꼽히는 정약용은 “우리 조선이 400여 년 동안 관복을 갖추고 조정에 벼슬한 자가 몇만인데 청백리로 뽑힌 이는 통틀어 110명뿐이니 사대부의 수치가 아닌가.”라고 하면서 공직자의 청렴이란 “녹봉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먹고 남은 것이 있더라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도 지닌 것 없이 떠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약용이 정의한 청렴함을 가장 잘 지킨 최고의 인물은 단연 황희가 아니겠는가. 황희는 녹봉 외에는 재산을 불리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았고 권력을 이용해 이득을 취한 적도 없으며 은퇴하고 나서는 쓰러져 가는 낡은 집이 전부였으니 세종이 집을 하사할 정도였다.



청백리 황희의 삶이 오늘날까지도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비윤리적인 지도자들이 여전히 남아있어서일 것이다.

청렴함은 곧 도덕적 성품을 가리킨다. 거짓과 부정, 권위와 명령으로 국민의 눈을 속이는 데는 한계가 있고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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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의 청렴함을 강조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 자료 출처; 나무위키에서 캡처



세계적인 반부패 운동단체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발표한 2024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한국은 64점을 받아 180개 국가 중 30위를 차지했다. 계속해서 순위가 상승하고는 있지만 OECD 38개국 중에서 21위로 여전히 상위권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청렴도를 나타내는 부패인식지수는 0점(매우 부패)에서 100점(매우 청렴)까지 평가해 순위를 정한다. 점수 산출은 세계경제포럼, 정치경제위험 자문공사, 세계 사법 프로젝트, 베텔스만 재단 등 세계적인 기관들의 자료를 참고한다.

높은 순위에 오른 국가들은 자본 및 비즈니스 환경에 유리하게 작용해 외국 투자 유치와 국가 성장 발전을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부는 반부패 정책, 반부패 리더십 강화로 공직자들의 청렴도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황희의 묘지명에는 “친족 가운데 외롭거나 가난하여 스스로 생존하기 어려운 자가 있으면 반드시 혼구를 꾸며 혼인시키고 재산을 털어 구휼하여 시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후에, 집에 살 때는 청렴하고 예의로써 스스로 지켜, 일은 모두 법대로 하고 수상이 되어서도 쓸쓸하여 포의지사(布衣之士 벼슬을 하지 않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 때 이미 6조 판서를 거치고 24년 동안 재상으로 있었던 황희가 받은 과전과 녹봉은 상당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가장 높은 정1품의 녹봉은 77명의 사람이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재물이었다.

충분히 많은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친족을 도와주고 혼인하지 못한 친족은 혼수까지 마련해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주었던 황희는 도덕적 예의를 실천함으로써 타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배고픈 이웃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그럴 때마다 자기 밥까지 덜어주며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또 과전이 있었음에도 백성들을 생각해서 소작료를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했고 대부분을 떠돌아다니다 흘러들어온 유이민의 정착을 돕는 일에 사용했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빈곤할 수밖에 없었다.



1448년(세종 30년) 황희의 부인이 죽자, 세종이 아내의 장례에 쓰일 물품을 내린 것으로 보아 장례를 치를 여유조차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살고 있던 한양의 석정동 자택으로 문종이 직접 문병을 온 적이 있다. 그런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냈던 황희가 멍석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하는 문종을 보고는 “늙은 사람이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라며 태연하게 말했다는 이야기는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황희의 청렴함은 후대에 이르러서도 국정을 논의하는데 적절한 예시와 미담으로 회자하는데 1686년 우의정 이단하가 흉작으로 백성의 기근과 각종 제향의 절감을 상소할 때도 황희의 이야기로 설득한다.

《숙종실록》 1686년(숙종 12년) 11월 29일 기사를 보면 “세종대왕께서 민간에 자못 사치스러운 풍습이 있음을 늘 걱정하시어 정승 황희에게 말씀하시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신이 마땅히 고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후, 등대(登對)할 적에 굵은 베로 장복(章服)과 내의(內衣)를 지어 입고 들어와서 임금을 뵙고 말하기를 ‘신은 백관을 통솔하는 자로서 신 자신이 이런 차림새를 하였으니, 백관이 어찌 감히 사치를 범하겠습니까? 그러니 성상께서도 이러한 뜻을 이해하셔서 몸소 검약을 실천하여 보여주심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세종께서 그 말을 받아들이시자, 한때의 사치스러운 폐습이 크게 고쳐졌다고 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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