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백두산 대호(大虎) 김종서 장군도 떨게 한 황희, 73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다

25회. 사직을 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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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쟁기념관에 있는 김종서 장군 흉상 ---> 자료출처: 나무위키에서 캡처



황희가 관후한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온후했지만 일단 조정에 나가면 그 위엄에 눌려 다른 관료들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김종서 일화를 들 수 있다.

어느 날 병조판서에 임명된 김종서가 공회에서 술에 취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을 황희가 보게 됐다. 북방 개척의 1등 공신으로 6진을 개척했고 ‘큰 호랑이’라 불릴 만큼 용맹한 장수이며 뛰어난 문신이기도 했던 김종서는 세종의 신임을 얻자 거만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황희는 하급 관리를 불러 “지금 병조판서의 앉은 자세가 바르지 않으니 의자 다리가 잘못된 모양이다. 어서 고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말을 들은 김종서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자세를 바로 고쳤다. 회의가 끝나고 황희가 자리를 뜨자 김종서는 “내가 6진을 개척할 당시 적의 화살이 날아들어 책상머리에 꽂혔어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라면서 민망해했다.



또 김종서가 강원도 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왔을 때, 토종꿀 한 단지를 가지고 와서 병졸을 시켜 황희에게 선물한 일이 있었다. 고맙게 여길 줄 알았던 황희는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면서 “이 꿀은 뇌물로 받았거나 공짜로 받은 것이 분명하다. 또한 나라의 녹봉을 받는 병졸을 사적인 심부름꾼으로 부렸다”라면서 호통을 쳤고 꿀을 돌려보내며 김종서를 꾸짖었다고 한다.



이 일뿐 아니라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는 동안 김종서가 여러 판서를 지냈는데 그가 사소한 잘못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마다 유독 김종서를 나무랐다. 보다 못한 좌의정 맹사성이 “김종서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이고 공이 추천한 사람인데 어찌해서 그리도 구박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종서는 이 자리를 이어받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는 성품이 거만하고 대사를 도모하는데 너무 과격해서 앞으로 자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낭패를 볼 때가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그 자만심을 꺾고 모든 일에 경솔하지 말라는 것이지 결코 그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면서 김종서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던 마음을 드러냈다.



훗날 황희는 사직을 청했을 때,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했다. 하지만 황희가 우려했던 대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자 김종서의 기세등등함이 하늘을 찔렀다. 황희가 죽은 후, 단종이 즉위하면서 권세를 쥐고 흔드는 위세와 독단이 더욱 심해졌다는 평판을 들었다.



그의 위엄있는 행동으로 셋째 아들 수신(守身)을 바른길로 이끈 일화도 전해진다. 수신이 한 기생에게 빠져 지내는 것을 알고 여러 번 꾸짖었으나 그 기생을 끊어내지 못하는 아들을 보자 그가 외출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관복을 갖추고 문밖에서 아들을 맞이했다.

깜짝 놀란 수신이 이유를 묻자 “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구나. 그러니 이제부터 나도 너를 손님으로 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신은 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다시는 기생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파란만장했던 황희의 공직 생활은 드디어 1449년(세종 31년) 그의 나이 87세에 이르러 은퇴를 맞이한다.

14세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무려 73년간 고려 3대 왕과 조선 4대 왕을 모시며 조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황희는 모든 국정 업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범한 노년의 삶을 살게 됐다.

재직 기간 동안 18번이나 냈었던 마지막 사직서에는 “흐려진 눈과 판단력으로 국사를 논한다면 전하와 백성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 옵니다.”라며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간곡히 청한다.

사직 후 사람들은 “재상의 자리에 있기를 20여 년에 지론이 너그럽고 후한 데다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라 사람의 여론을 잘 진정시켜 당시 사람들이 명재상이라고 불렀다.”라고 황희를 칭송했다.

세종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특별히 2품의 봉록을 종신토록 지급하게 했고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면 항상 사람을 보내 황희의 의견을 물었다.



황희의 노년 생활은 비록 몸은 늙고 병들어 거동은 불편했으나 정신은 맑았고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한쪽 눈을 번갈아 감으면서 책을 읽을 만큼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총명함은 여전해서 사직 후에도 법도와 역사 등을 훤히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이 쓴 글의 음과 뜻, 점과 획까지 틀린 적이 없었으며 특히 산수(算數)에 있어서는 젊은 사람도 이길 수 없었을 만큼 정확했다고 한다.



평소 가벼운 산책을 즐겼던 황희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대추나무 옆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주고 쉴 수 있게 해주었다. 황희는 매우 기뻐하며 언제나 수수한 차림으로 죽장을 짚고 나와서 정자에 앉아 시조를 읊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삶을 즐겼다.

당시 황희가 지었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강과 호수에 봄이 오니 이 몸도 할 일이 많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뒷산에 싹이 난 약초는 언제 캐려 하는가



생동하는 봄이 오니 그물을 고쳐 고기를 잡으러 가려는 황희의 부지런함이 느껴진다. 뒷산에 피어난 여린 새싹에서 봄의 기운을 느끼면서 약초 캘 걱정을 하는 것은 아마도 잘 자란 약초를 늦지 않게 캐서 병자를 고쳤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황희가 여생을 보냈던 곳은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이 있는 자리이다. 갈매기를 벗 삼아 잠시나마 노년의 여유를 즐겼던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이 정자는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고 했다.

황희가 죽은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 유림이 유적지로 수호하려 내려왔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이 일대에 부분적으로 정자를 복원해 오다가 1967년 개축하고 1975년 단청과 축대를 손보았다. 1988년 유적지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양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새롭게 고쳐 오늘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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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반구정이 있는 황희 유적지에는 그의 일대기를 비롯해 삶과 사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된 방촌 기념관과 황희의 증손 부사 황관의 아들 황맹헌의 신위를 모신 월헌사가 있다. 황맹헌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명나라에서까지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리고 본가 터에는 후손과 유림이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방촌영당(&;村影堂)이 있는데 매년 황희의 생일인 음력 2월 10일 후손과 지역 유림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반구정의 원래 위치였던 자리에는 육각정인 앙지대(仰止臺)가 있으며 황희의 모습을 형상화해서 세운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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