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아침발걸음] '설영(雪詠)', 눈 내리는 광경을 보고

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11월 10일 15시41분

'설영(雪詠)'은 통일신라시대 천재 시인이자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한시(漢詩)이다. 당(唐)에 유학하여 874년 약관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인백기천(人百己千)의 노력으로 거둔 결실이었다. 율수현위(溧水縣尉) 벼슬 3년 임기를 마치자 다시 전선제도(銓選制度)에 따라 또 수선기간에 들어갔다. 언제 다시 벼슬이 제수될지 모르는 막연한 외국생활이었다. 이역만리 이방인은 쓸쓸했다. 그는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응시하기 위해 종남산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하필 이 무렵은 황소의 난을 비롯한 여러 고을의 변란으로 혼란한 시기라서 고위 관리 등용문인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 시험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시험에 응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였다. 외우내환이 많아 박학굉사과도 열릴 기약이 없고, 녹봉과 양식이 떨어져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다. 당나라 친구 고운(顧雲)의 추천으로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병(高騈)의 막하에 들어갈 무렵이다. 고병에게 헌정(獻呈)할 목적으로 지은 '칠언기덕시삽십수(七言記德詩三十首)'에는 근헌사도상공(謹獻司徒相公)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부제는 곧 “삼가 사도 상공 고병에게 올리는 시”라는 뜻이다. 30수 시작품 중에 '설영(雪詠)'이란 제목의 시(詩)를 살펴보자.

'설영(雪詠)' '눈을 보고 읊음'

五色毫編六出花 오색 부드러운 털실로 짠 고결하고 아름다운 육출화(六出花)

三冬吟徹四方誇 내리는 눈은 추운 겨울 내내 밤새 읊조려 사방에 자랑하네.

始知絶句勝聯句 절구(絶句)를 알기 시작하여 연구(聯句)도 뛰어나

從此芳名掩謝家 이로부터 아름다운 이름 얻어 사령운 집안을 덮어버리네.

참으로 이는 명작이다. 눈(雪)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꽃(天花)이고, 산야(山野)에 핀 설화(雪花)요, 여섯 모의 결정체인 육출화(六出花)이다. 기(起)에서 읊었다. 눈처럼 고결하고 아름다운 게 어디 더 있고 설원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찬란한 게 또 어디 있으랴? 그의 시각은 눈이 내리는 광경에 쏠렸다가 다시 육각형의 눈(雪)에 쏠렸다. 작품에서 그는 눈을 “육출화(六出花)”라고 하였다. 그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 내리는 모습을 오색 털실로 영롱한 모직물(毛織物)처럼 보았다. 그는 눈이 흰 색이지만 햇빛에 반짝여 오색 빛을 발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승(承)에서 그는 밤새 눈이 내리는 것이 마치 밤 새워 나지막이 시를 읊고 있는 양 여기고 있다. 눈(雪)이 살아서 시를 읊조린다. 노래를 부른다. 이는 활유법이다. 전(轉)에서 처음 눈이 조금씩 띄엄띄엄 마치 절구(絶句)처럼 내리더니 나중에 소복소복 마치 연구(聯句)처럼 내린다. 이를 한시(漢詩)의 절구, 연구로 비유하더니, 활유법을 썼다. 눈(雪)이 절구(絶句)를 읊다가 연구(聯句)도 잘하여 흐믓하다. 결(結)에서는 눈 내리는 광경을 눈(雪)이 시를 짓는 광경으로 치환(置換)해 둔다. 시(詩)를 지어 읊기 시작하여 꽃다운 이름을 얻은 시인 사령운 집안의 시작(詩作) 솜씨는 유명하다. 눈(雪)이라고 하는 시인은, 사령운(射靈運) 집안 형제들의 글솜씨를 능가한다. 찬탄에 또 찬탄이다. 최치원, 그는 대조, 비교, 활유의 기교를 사용하여 이런 천재적인 솜씨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찬란한 시를 지어 냈다. 정말 천재 시인이다. 눈 내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그렸으되, 다소간 이역(異域)에서 이방인의 쓸쓸함이 묻어 있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가야산독서당'에 부쳐

狂奔疊石吼重巒 켜켜이 쌓인 돌 사이로 미친 듯 뛰는 큰 물소리 웅장해

人語難分咫尺間 사람의 말소리 가까운 지척 간에서도 알아듣기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 늘상 세상의 시비 소리 귓가에 들릴까 저어하였더니

故敎流水盡籠山 그래서 흐르는 물로 온통 산을 에워싸도록 했군.

높은 산봉우리와 바위들이 서로 얽혀 있는 골짜기를 멋대로 내달리는 거친 폭포수가 있다. 그 곁에 고요한 서당 한 채 있다. 그 건물 안의 학창의(鶴氅衣) 입고 유관(儒官)을 쓴 노년의 선비가 있다. 그 선비는 아무런 잡념 없이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산수화 한 폭이 펼쳐진 듯하다. 그것은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져 생생하다. 곁에서 말하는 사람의 말소리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온통 가득한 세찬 물소리가 이 시의 핵심이다. 폭포 같은 세찬 물소리, 그 소리가 온통 산을 에워싸고 있다. 그 세찬 물소리로 온통 자연의 장벽을 쌓은 것이다. 작중 화자는 이것을 자신으로 하여금 탈속(脫俗)하여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말고 도(道)를 닦으라는 조물주의 배려라고 보았다.

산수화 한 폭 펼쳐놓은 듯한 시각적인 이미지에 세찬 물소리로 온 산을 에워싸고 있다는 청각적인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어 공감각적 이미지가 성큼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생생함, 곧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그 생생한 시적 표현에 시인은 세속을 멀리하고 산수에 묻혀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하다. 그의 또 다른 시작품에서도 탈속(脫俗)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증산승(贈山僧)'에서

僧乎莫道靑山好 스님! 청산 좋다는 말 마시오.

山好何事更出山 정말로 산이 좋으면 뭣 하러 나오시오?

試看他日吾踪跡 두고 보오, 나의 훗날 자취를.

一入靑山更不還 나는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 결코 나오지 않으리니.

이라 읊조렸다. 제목 '증산승(贈山僧)'은 깊은 산에 사는 스님에게 주는 시라는 뜻이다. 청산이 좋다고 하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승려들은 자꾸 속세에 나왔지만, 그는 마침내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더 나아가 정녕 부지소종(不知所終)하였다. 곧 최후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시해(尸解)되어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전설로 남았다. 그의 무덤은 없다. 그는 시선(詩仙)이다. /유종국(전 전북과학대 교수·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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