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기억]<42>하버드 첫 한국인 박사 하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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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YMCA 하기 봉사활동 때의 기념사진, 우로부터 현제명과 하경덕 박사, 고황경 박사(서울여대 총장)의 얼굴도 보인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학의 한국인 박사 제1호인 안당 하경덕(晏堂 河敬德). 그는 익산군 춘포면에서 태어나 전주 신흥학교를 나온 대학자임에도 우리 전북 사회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경덕 박사는 1897년 6월 26일 이 고장 익산시 춘포면에서 본관이 진주인 하경열(河慶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중류 이상의 부유한 편이었고 아버지는 유학자로써 한 때는 서당의 훈장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 하경열이 전주의 기독교계인 신흥학교 한문교사가 되자 일가가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됐고, 이에 따라 하경덕도 신흥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게 됐다. 그 후 평양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15년에 졸업했다. 숭실중학교도 신흥학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장로회 계통의 학교이다.

▲ 하경덕 박사
안당은 숭실중학교를 나온 후, 서울 YMCA학원 영어과에서 1년6개월 공부를 한 후 191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유교적인 환경속에서 자라면서 한학을 배웠으며, 소년기에서 청년기에 접어드는 시기에는 기독교계의 학교에서 공부한 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인천에서 상해를 거쳐 1916년 9월 30일 센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이 때 미국에 간 한국인 학생은 26명이나 됐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고학을 하면서 그곳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 1921년 9월, 드디어 명문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 이 무렵 훗날 재미 한국인 소설가로 유명한 강용흘(姜鏞訖)은 보스톤대학생이었다.

1925년 하버드대학 문학과를 졸업한 안당은 이 해 9월,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박사과정을 거치고, 1928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재학 중인 때는 사회학과가 독립되지 않았었다. 현 사회학과의 전신인 사회윤리과에서 학위과정을 마쳤던 것이다. 이 보다 앞서 하버드대학 석사과정을 마친 한국인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었다.

하 박사의 학위 논문은 ‘사회법칙론’(social laws : A study on the Validity of sociological Generalizations)이었다. 이같이 짧은 기간 내에 석사와 박사과정을 모두 마친 것으로 보아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연구조교로 잠시 근무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 심각한 경제공황이 닥쳐 사정이 어렵게 되자 1929년 귀국했다. 1930년 하 박사는 이 학위논문을 미국에서 출판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하 박사의 논문집 ‘사회법칙론’이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사회학 교재로 채택되었다는 사실이다. 영문판이기 때문에 저자가 한국인인지 잘 모르고 몇 년 동안 교재로 사용하다가 마침내 저자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취소했다는 것이다.

하 박사는 귀국하여 한 때 YMCA 사업조사위원회 총무로 일하다가 1931년부터는 연희전문(현 연세대학)에서 사회학 교수가 됐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사회학이 사회주의를 가르치는 학문이라는 일제의 오인아래 사회학 강의가 금지되고 그 뒤부터는 영문법을 강의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보아 하 박사는 분명히 우리나라 사회학계의 선구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학계에 덜 알려진 편이다. 그것은 그가 재직했던 연희전문에 사회학과가 없었으므로 사회학을 전공하는 제자를 길러내지 못한 점과 또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사회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지 못한 때였으며 그 후 막상 사회학계가 형성된 때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거기에 하 박사의 주저인 ‘사회법칙론’이 영문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국내학계에 알려지기 힘들었으며, 또 우리나라 사회학 발전에 연구나 사회학 문헌목록이 모두 광복 이후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 박사의 저서는 이밖에도 ‘사회학 입문’이 있다.

하 박사는 광복직전인 1943년 연희전문에서 물러 나왔다. 아유는 그가 당시 일본의 적국인 미국교육을 받은데다가 또 반동학문이라고 하는 사회학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단체인 흥사단(興士團 ? 안창호 창설)에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에 의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이 광복을 맞았어도 하 박사는 학계에 돌아가지 않고 흥사단을 비롯하여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해 9월에는 영자지 ‘코리아 타임즈’를 창간하고 사장을 맡았다. 당시 창간호에 실린 사설 ″연합군 장병을 환영하노라.″는 그가 직접 집필한 것이었다. 그는 이 사설을 영문만이 아니리 우리 글로 도 썼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1월에는 일제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바꾸어 새 출발을 할 때 잠시 부사장을 지내다가 이내 사장이 됐다. 한편으로는 합동통신 중역을 겸했으며 월간 ‘신천지’도 자매지로 발간했다.

하 박사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던 관계로 미 군정당국과는 무척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진주하고 있는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과도 각별한 교분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리하여 1947년 미 군정하의 과도정부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이 되기도 했다. 또 1948년 초에는 인도에서 열렸던 범아시아 문화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일도 있다. 그 외에도 국제문화협회장, 한미문화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 같은 요직은 오직 미군정 당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자 하 박사는 모든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버렸다. 그 이유는 그가 흥사단의 주요멤버였기 때문이다. 하 박사와 이 대통령과의 관계는 별스런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이 박사와 흥사단의 창설자 도산 안창호와는 사이가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이 박사와 안창호와 사이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좋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 1950년 6 ? 25 때 남하 피난을 못했던 하 박사는 인민군에 붙들려 모진 고통을 겪었다. 그리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9 ? 28 수복을 맞고는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때 동경 연합군총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의 고문으로 지내다가 1951년 그곳에서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5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이같이 지식인으로써 국제적으로도 명망이 높았던 하경덕 박사를 정작 그의 출신지인 전북에서 잘 알려지지 않아 지난 2007년 6월 26일, 그의 탄신 110주년을 맞아 필자가 주도하는 전북향토문화연구회와 전주신흥학교 총동창회에서는 ‘안당 하경덕 박사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그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가진바 있었다.

/이치백(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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