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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교수의 전북문화재이야기] 진안 주천면의 와룡암과 주천서원

“군자지향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진안 주천면에는 조선시대 교육과 향약의 메카가 되었던 와룡암과 주천서원이 있어서 정신적 문화유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7월 07일 13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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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서예가,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초빙교수)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문화공간이였던 누각이나 정자와는 달리 공적 기능을 겸한 공간으로서의 암자를 경치 좋은 곳에 지어 교육 기능을 겸하였던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형태의 대표적인 전북문화재로는 진안군에 있는 와룡암(臥龍庵,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8호)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암자는 지명에서 알수 있듯이 주자를 신봉했던 군자지향인 주천면(朱川面)의 주양리(朱陽里) 주자천(朱子川) 변의 소(沼) 부근에 위치해 있는데, 용이 꿈틀거리다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와룡암(龍龍岩)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마루집으로, 바로 옆에 있는 주천서원(朱川書院,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42호)의 강당 같은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와룡암은 긍구당 김중정(肯構堂 金重鼎, 1602~1700)이 1636년(인조 14)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있다가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친명파의 한사람으로 사림에 묻힐 것을 각오하고 36살 때인 1637년(인조 15) 조부인 김충립(金忠立, ?~?)과 함께 주천으로 낙향하여 시와 거문고로 소요(逍遙)하다가 후진양성을 위해 53세 때인 1654년(효종 5)에 세운 개인 서당 겸 학당이다.

이후 이곳은 약 300여명의 문인 학사들이 배출되어 진안의 학문과 문화의 큰 맥을 형성하는 전당이 되었다. 원래의 와룡암에는 이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많은 저서들이 수장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천변에 있는 까닭에 여러 차례의 수해로 인하여 대부분 유실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1827년(순조 27)에 후손인 김상원(金相元)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지었다.

김중정은 이곳에서 학문연마와 저술을 병행하여 많은 문헌을 남겼으나 여러 차례의 수해로 소실되고 없으며, 1899년에 후손들이 그의 글을 모아 간행한 1책의 목활자본인『긍구당유고(肯構堂遺稿)』만이 남아 있다. 이 문집에는 와룡암과 관련한 시와 산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긍구당서(肯構堂序)」에는 저자가 은둔생활로 일생을 지내고자 하는 심경이 잘 나타나 있으며, 상량문인 「와룡암서재상량문(臥龍巖書齋上樑文)」은 주자천(朱子川) 하류에 있는 화산(花山)에 서재를 지으며 쓴 것으로서, 주위의 풍경을 유려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와룡암을 중심으로 한 은거생활과 관련한 시로는 「매곡폐거(梅谷弊居)」를 비롯하여 「매곡한취(梅谷閒趣)」·「초거한취(草居閒趣)」·「유거한취(幽居閒趣)」·「한중(閒中)」·「한거(閒居)」·「사회(寫懷)」 등이 있으며, 이러한 시에서 혼탁한 세상을 벗어나 주천에서 한가로이 살려는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고, 더욱이 「주천추영(朱川秋詠)」·「용호춘경(龍湖春景)」·「주천별서(朱川別墅)」 등에서는 은둔생활에서 느끼는 고독한 심사를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와룡암 내부 벽면에는 ········ 및 많은 시액(詩額)의 현판과 편액, 주련이 걸려 있어서 와룡암의 역사와 문화를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와룡암의 학풍은 주천서원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주천서원은 우리가 보아온 규모를 갖춘 서원이 아닌, 홍살문, 외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어 강학공간은 제외되고 제향공간인 사당만 있어서 주자(朱子)·여대림(呂大臨)·주잠(朱潛)·이황(李滉)·이이(李珥)·이충립(李忠立)·김중정(金重鼎) 등 7명을 배향하고 있다.

이와같이 조선중기에 형성된 와룡암의 학풍은 후손에게 이어져 사회적 역할로 확산되어, 김상원은 전라북도 동부권에서 1700년대 최초로 설립된 향약인『주천향약』의 편찬에 적극 참여하였고, 김기열이 서문을 썼으며, 김태현이 쓴 향약문 후기를 썼다. 이 책 또한 1925년 즈음 와룡암에서 증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와룡암은 전북 동부 지역 최초의 학당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근대화된 교육기관의 모태가 되어 1908년에는 후손인 김태현(金泰鉉, 1847~1919)에 의해 사립 화동학교로 발전하여 배일 사상과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공립 학교로 전환됐으나 그 정신은 이어져 진안 지역에서는 이후에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게 되었다.

따라서 와룡암은 단순한 정자나 암자의 의미를 떠나 진안 유림의 정신적 요람이였으며, 학문의 전당으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당 겸 학교였을 뿐만아니라, 건축양식 및 현판, 주련 등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임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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