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0년09월24일23시27분( Thursday ) Sing up Log in
IMG-LOGO

[지역의재발견]문화재돌봄 10년의 현장을 가다3, 전주 향교

“서울을 제외한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향(鄕),
교(校)는 배움의 터, 즉 지방의 학교"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8월 05일 13시31분
IMG
/전경미(예원예술대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향(鄕)이란 서울을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고 교(校)는 배움의 터를 말하는 것이므로 `향교'는 `지방의 학교'라 할 수 있다. 향교에서는 유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실천윤리 배우는 곳이었으며 유학에는 죽은 뒤 영생을 추구하는 내세관을 갖지 않았기에 종교라 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되었다.

고려 성종 최승로가 역대 왕의 선악득실을 분석하여 올린 28조의 상서에서 `…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요,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금일의 급무이니 금일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인데 가까움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하여 결국 불교의 연등회, 팔관회 등을 폐지하고 유학을 정치이념의 중심에 두면서 유학은 현재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의 기질 같은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은 공자에 의해서 집대성된 철학 사상으로 유가, 유도, 공자교라고도 하는데 원래 유학의 `유(需)'는 고대 중국에서 「사회의 교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예의를 담당하던 직업」이었으며, 이러한 것이 기원전 551년에 노나라 추 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에서 태어난 공자에 의해 집대성된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내가 이야기하는 유학은 요순과 주공에 의해 완성된 것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지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니다”라고 천명하였다.

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학의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과 史學을 상류층의 중앙귀족 자제 교육을 담당하였고, 경당을 세워 문무일치의 교육 위주로 지방 평민층의 자제에게 오경과 궁술 교습을 교과목으로 하였다. 특히 경당은 우리나라의 지방 학교 건립의 최초 기록이며 『신당서』 고구려전에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며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 큼지막한 집을 지어 경당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을 이곳에 보내어 경(經)을 외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2년(648)에 견당사 김춘추가 당의 태학원을 찾아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통해 이 시기에 ‘국학’의 설립을 추진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설총(650년경~?)은 이두문자로 유학서를 해석하여 유학의 토착화에 기여했다고 보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 시대 682년 신문왕 2년 국학을 설립하였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태조부터 992년 성종11년까지는 경학(經學)으로 이름을 바꾸어 교육하였고 여러 이름으로 개명되다가 하고 1362년 공민왕 11년에 성균관이라 개명되었다.(한국의 향교, 문화재관리국, 1999)

조선시대에 들어와 건국 초부터 유학을 장려하여 한양을 도읍으로 건설하는 과정부터 유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이루었다. 즉 『주례』에 따라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로 종묘 사직 배치하였고 한양의 사대문과 종각의 명칭을 유학의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을 대응시키는 이름으로 지었다. 건국 초기에 정도전에 의한, 유학의 발전이 곧 국가 발전임을 역설하면서 유학의 국교화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유학은 유교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전주, 전통의 도시로 알려진 전주에 전주향교가 여전히 그 기능과 목적을 유지하며 자리하고 있다. 전주 향교는 1364년에 현재 경기전의 북쪽에 건립하였으나 이태조 영정을 봉안하는 경기전의 건립을 위해 1410년 현재의 신흥학교 자리로 이건되었다가 4대문 내에서 거리가 멀고 전주천을 건너다니는 문제, 좌묘우사제도에 따른 장소의 문제 등으로 1603년 현 위치로 재이건 되어 400년 넘는 시간을 자리하고 있다. 향교의 배치는 원래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앞에 자리하고 배움터인 명륜당이 뒤쪽에 자리하는 배치법을 가지고 있지만 산지고을에서 이 배치법을 따르면 명륜당이 대성전을 누르는 형국이 되어 산지고을과 같은 곳에서는 대성전을 뒤에 놓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법을 따르게 되었다.

전북문화재돌봄 동부권사업단이 전주향교를 돌보기 시작한 시기는 2013년부터이다. 문화재돌봄의 시작 해부터는 국가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를 대상으로 진행하였고 2013년부터 지방지정문화재를 돌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전주 향교 역시 관리자가 있다하여도 그 넓은 구역을 관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았다. 따라서 우리는 2013년에 예초 및 배수로 정비, 낙엽치우기 및 수목 정리 등의 환경정비로 2013년 한해에 35회 이상을 할애할 정도였다. 그 후 2014년에 예초 및 제초, 수목정리, 낙엽치우기 등의 일상관리는 반 이상으로 줄었고 이때부터 경미한 보수를 진행하게 되었다.

문화재의 경미한 보수는 말 그대로 작은 보수 즉 기와 몇장 교체하는 일, 기와고르기, 벽체의 일부분 탈락된 곳 미장하기, 배수로 정비하기, 담장 넝쿨제거하기, 일부 담장 훼손의 보수, 창호지 바르기 등등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5년부터는 경미한 보수의 일을 계속 진행하면서 흰개미모니터링이라는 전문적인 모니터링을 실시하였고 건물의 기울기 등을 모니터링하여 분석 중에 있다. 특히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는 부분은 명륜당 건물이다. 건물 자체도 특이하지만 건물 배면에 담장 밖의 수로를 명륜당 배면으로 돌려 배출하고 있는 점이다. 배수로가 명륜당 건물과 거의 맞닿아 있어서 습기와 목부재의 상관관계를 모니터링 하고 있는 중이다.

전주향교에 400여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4그루 있다. 은행나무를 심은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문화재를 보존관리하는 나로써는 우리의 열심한 보존관리에 의해 관람환경이 더 좋아져 은행나무 열매처럼 많은 사람들이 전주 향교를 방문하기를 기대한다.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새전북신문 기자의 최근기사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APTCHA Image [ 다른 문자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