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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내가 만약


기사 작성:  이종근
- 2020년 08월 06일 15시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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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



나는 삼수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고3 때 지금의 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예비고사제도가 처음 생겼다. 예비고사에 합격한 사람만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고 본고사를 볼 수 있었다. 그럭저럭 지방의 국립대학교 중위권학과에 합격했다. 학업에 게을렀던 일이 후회되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보다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감히 재수를 선택했다. 결과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와신상담의 각오로 삼수생의 타이틀을 달았다. 처음의 굳은 의지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은 풀어지고 실력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결국 동일한 대학의 같은 학과에 2년 늦게 입학했다. 세월만 허송한 꼴이 됐다.

상처 없는 영혼 없고 후회 없는 인생 없다고 한다. 크고 작고, 강하고 약한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삶의 기억에서 삭제하거나 정정하고 싶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후회로 드러난다. 시간을 되짚어 돌아갈 수 있다면, 내 인생의 딱 한 꼭지만 수정할 수 있다면 재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지금도 후회가 크다

“그때 만약 내가 오로지 공부에 매달렸더라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소환하여 현실에서 있었던 사실과 반대의 가설을 세워가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후회한다고 운명의 범위 안에 있는 인생의 역사 전반을 바꿀 수는 없다. 가장 크게 후회되는 포인트 한두 개 바꾼다고 해서 내 삶이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엄청나게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글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무궁하게 쌓인 인생 경험을 바리바리 싸들고 과거로 돌아가거나 나의 인성을 이루는 DNA 또는 내 운명을 아주 확 바꾼다면 모르지만 백지상태로 시간만 되돌린다고 무엇이 크게 달라지랴.

그래서 나는 타임 슬립(time slip)의 상상이나 ‘만약 내가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 시간들은 추억의 자리에 잘 갈무리해두고 가끔 반추하는 것으로 끝나야지 가설을 세워가며 후회한다고 현실의 아픔이 가라앉거나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마음의 회한이 커지고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만약”이라는 가설의 상상력을 부정하거나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만약…‘이라는 상상에 하루에도 몇 번씩 빠져드는 마니아다.

뉴스를 보다가 나를 화나게 하거나 마음이 짠해지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만날 때면 바로 상상에 빠져든다. 그것들을 일일이 불러내어 일렬로 줄을 세우고 옛날에 통행금지 위반자 약식재판 하듯 하나하나 내 마음에 들도록 속 시원하게 처분 한다. 그늘진 곳에는 따뜻한 바람과 볕을 보내고 병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에겐 치유의 광선을 쏘아 완쾌시킨다. 잘못된 정치인이나 나쁜 놈은 때려주고 얄미운 사람은 그 자리에서 야무지게 혼내준다.

그러려면 사건마다 내가 달라져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이 되었다가 돈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재벌이 되기도 하고 소설 《인간시장》의 〈장총찬〉으로 모자라면 〈맥가이버〉로까지 변신해야 한다. 간혹 필요할 때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인들 나를 따라올 수 있을까. “내가 만약”의 상상이야말로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조자룡 헌 칼 쓰듯 마귀 휘둘러도 다른 사람에겐 아무런 피해도 없이 내 속만 시원해지니 이보다 더 좋은 놀이가 어디 있을까.

이 상상 놀이는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사이다의 기포 터지는 시원함보다 더 한 마성에 나는 이미 중독 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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