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창(淳昌)’이란 지명은 순창의 지형이 양(羊)의 모양으로, 순박하게 창성한다는 뜻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서거정은 `귀래정기'에서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 산수가 아름답고 논밭이 풍요로우며, 물가의 어장 또한 넉넉한 곳”이라고 감탄했다. 예로부터 ‘생거부안 사거순창(生居夫安 死居淳昌)’이란 말도 전해온다.
삼인대비는 1744년(영조 20)에 세운 것으로 도암 이재가 비문을 짓고, 정암, 민우수가 비문의 글씨를, 지수재 유척기가 전서를 썼다. 중종반정 후 반정공신들이 숙청당한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해 중종에게 폐비를 강요하여 신씨를 폐출하고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章敬王后]로 맞아들였으나 10년만인 1515년(중종 10)에 사망했다.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순창군수인 충암 김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유옥 등 세 사람이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에 모여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의 복위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고 각자의 관인(官印)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했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은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르게됐다.
예로부터 순창은 역사적으로 중종반정 후 정치적 격변기의 희생양으로서 7일 동안만 국모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비였던 단경왕후를 다시 복위시키자고 상소한 당시 순창군수인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류옥은 장류(醬類)처럼 변함없는 절개와 충절의 인물을 떠오르게 한다.
순흥안씨 사제당(思齊堂) 종가가 2010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한 &;기묘제현수필&;(보물 제1197호)과 &;기묘제현수첩&;(보물 제1198호)이다. &;기묘제현수필&;은 사제당 안처순(安處順)이 구례현감으로 부임할 때 24명의 지인이 써준 전별 시문첩이고, &;기묘제현수첩&;은 1517년부터 1531년까지 12명의 지인이 안처순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간찰첩이다.
기묘명현은 1519년(중종 14)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도한 훈구파와 신진 사림파들의 갈등으로 발발한 기묘사화로 인해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구(金絿) 등의 인물들을 말한다.
조선 연산군 12년(1506) 훈구세력인 성희안과 박원종이 임사홍, 신수근 등과 결합하여 포악한 정치를 거듭하던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인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하여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장경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인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 문안현감 유옥 등이 결의하여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를 다시 왕비로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에서 쫓겨날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職印:직인)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그 후 이곳에 비각을 세워 삼인대(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 순창 삼인대 (淳昌 三印臺)라고 했다.
기묘제현수첩, 1519년 김정의 편지
『충암집』에 의하면 이 편지는 1519년(중종 14) 6월 4일에 지은 것이다. 김정은 이 편지에서 근친覲親을 위해 귀향한 사실, 형조판서에 특배된 일, 발문(跋文) 찬술 등을 언급하였다. 발문은 『근사록近思錄』 발문을 지칭하는데 1518년 2월 29일 안처순이 구례(求禮) 임소로 떠나기 직전에 중종(中宗)은 교육의 흥기, 『근사록』의 간행과 반포 등에 대해 하교한 바 있다. 안처순은 일 년 남짓 걸려서 『근사록』의 간행 준비를 마친 뒤, 김정, 기준奇遵, 김구金絿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발문 없이 간기刊記만 새긴 채 『근사록』을 간행하였다. 원문 뒷부분에 적힌 날짜와 추기 부분이 오려져 있는 것은 당시 위정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조처로 여겨진다.
기묘제현수첩, 1520년 김정의 편지
1520년 1월 18일, 김정이 금산(錦山)에서 진도(珍島)로 이배되었을 때 안처순에게 보낸 편지다. 김정은 의금부 낭관에 의해 해남(海南)으로 압송된 파릉군 이경(李璥)에 관한 소식을 먼저 꺼냈다. 파릉군은 태종의 아들 경녕군(敬寧君) 비(&;)의 증손으로서 기묘사화 직후 해남에 부처(付處)되어 2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1534년(중종 29) 12월에 사망하였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빈청(賓廳)에 나아가 울면서 극간했고,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을 책망하며 “희강(希剛: 長坤)이 여우와 쥐새끼들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어진 이를 해치는구나”라고 호통을 쳤으며, 조광조 등의 원통함을 씻어 주고자 상소를 올렸다. 해남에 유배된 것은 이 때문이다.
김정은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글쓰기로 자신의 고단한 심사와 현실을 기술했는데 장자(莊子), 자치통감, 근사록(近思錄) 등에 수록된 표현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있다. 엄동한파를 무릅쓰고 귀양길에 오른 뒤 술로 끼니를 대신했고 설상가상으로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중풍까지 걸렸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작금의 처지에 괴로움을 금치 못하며,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암담한 미래를 예견했다.
조정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였기에 몇 달 만에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한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때마다 과거의 장면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14세에 별시 초시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19세 때 생원시에 입격하고 3년 뒤 문과 장원을 거머쥐고 다시 1년 뒤 정시(庭試)에서 장원하고 20대에 두 차례나 사가독서에 피선될 만큼 청년 김정은 학식과 필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박상(朴祥)과 함께 당시(唐詩)와 진한고문(秦漢古文)을 전범으로 삼으며 기건(奇健)한 풍격으로 당대 문풍을 변 화시켰고, 무엇보다 서른네 살에 형조판서에 임명되어 육경의 반열에 오른 그였다. 문득문득 지난날의 영예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김정은 약관의 나이에 「용잠(勇箴)」이란 글에서 “커다란 용기를 지닌 사람은 헐뜯어도 성내지 아니하고, 침범해도 놀라지 아니하며, 욕보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노라. 의(義)를 실천하는 데 용감하므로 분노 따위의 일들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편지 중간부터는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겠노라고 다짐했으나, 술이 없으면 수시로 밀려오는 곤궁한 시름을 달랠 길이 없었다. 평소 음주를 즐기던 김정은 적객(謫客)의 고단한 심사를 오직 술로 달랬는데 외딴섬에서 술을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김정은 소주 두세 말을 빚어서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의지할 것은 친구뿐입니다[所仗者友生耳]”라고 적었다. 이 여섯 글자는 김정의 절박한 처지와 두 사람의 교분을 십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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