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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22일 열반


기사 작성:  이종근
- 2021년 07월 22일 14시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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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며 한국 현대 불교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송월주 대종사(금산사 조실스님)가 22일 오전 9시 45분 금산사에서 열반했다. 법랍 68년, 세수 87세.

1935년 정읍 산외에서 태어난 송월주 스님의 법호는 태공(太空)이며, 속명은 송현섭이다.

정읍농고와 화엄사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거쳐 동국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했으며, 원광대에서 명예철학박사를 받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불도의 길에 들어섰으며, 법주사에서 금오대선사를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56년 화엄사에서 금오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정화운동이 한창이던 1961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파격적으로 130여 개 사찰을 관할하는 금산사 주지로 임명됐다. 이후 중앙종회 의원(1966년~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1970년~1973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1973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장(1978년)을 거쳐 1980년 4월 제17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신군부가 일으킨 10.27법난으로 강제 퇴임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해 불교의 사회참여에 적극 관심을 갖고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등에서 공동대표 또는 이사장을 역임했다. 지난 2006년까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를 맡아 북한을 수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1994년 11월 14년 만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재선출되어 개혁종단을 이끄는 선장이 됐다. 개혁종단의 수장이 된 이후 현재까지 불교계는 물론 시민사회운동까지 그 영역을 확장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었다.

우리민족서로돕기 상임공동대표 겸 이사장, 실업극복국민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 나눔의 집 이사장, 지구촌공생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거나 맡았었다.

종교계 안팎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을 인정받아 2000년 6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고,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조계종은 26일 오전 10시 금산사에서 종단장으로, 다비식은 연화대에서 치른다. 분향소는 처영기념관에 마련됐다./이종근 기자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의 발자취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송월주 스님. 2000년대 초반 한 언론은 이 세 명을 가리켜 ‘종교 지도자 삼총사’라고 불렀다.

1990년대 말부터 본격화했던 이 세 명의 공동 행보는 사회와 호흡해야 하는 종교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국가의 큰 일이 생길 때마다 정치권은 이 세 명을 수시로 초청해 의견을 나누었고, 국민들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특히 그 빛을 발한 건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았을 때였다. 양극화 해소와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세 명은 한발 앞서 나섰고 이후에 종교계의 전폭적인 동참을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급기야 세 명의 공동 발의로 ‘함께일하는재단’(구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이 만들어지면서 이 아름다운 행보는 정점을 찍었다.

세 명 중 두 명은 이미 선종(김수환 추기경)과 소천(강원용 목사)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송월주 스님은 여전히 나눔의 집, 지구촌공생회 등의 사회 활동으로 자비 실천의 길을 걸었다.

그는 살애생전 송월주 스님이 출가 이후 절차탁마하며 보낸 시간에 대한 기록이자 수십 년 시민사회운동에 발 딛고 사회봉사를 실천하며 느낀 소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유했던 여러 인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담았다.

워낙 광범위한 활동을 펼쳐왔던 저자이기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때론 조계종의 근현대사이며 또 때론 질곡과 영광을 함께했던 한국사이기도 하다.

“(불교) 종단사는 송월주 스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스님은 세간에서 시민사회 운동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불교계에서는 개혁종단을 이끌었던 수장으로서의 면모로 더 깊이 각인되어 있다. 혹자는 현대 (불교) 종단사를 살필 때 송월주 스님 이전과 이후로 나눠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분기점에 해당하는 사건이 1994년 종단 개혁이다.

이는 개혁 세력에 의해 추대되어 총무원장이 된 송월주 스님의 종단 혁신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었다.

물론 이런 실천의 단초는 저 멀리 1980년으로 올라간다. 1980년 4월 제17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송월주 스님은 자주적인 종단, 개혁적인 종단을 꿈꾸며 큰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27일 신군부에 의해 그 꿈은 산산이 무너졌다. 10·27 법난이다.

스님과 불교계 인사 153명이 연행되고 3만 2천여 명의 병력이 전국 사찰 5,700여 곳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정화’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그것은 미명일 뿐, 사실상 정권 안정을 위한 불교계 길들이기였다.

이후 십수 년, 때론 정권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때론 자율종단을 위해 애를 써 보기도 했지만 조계종은 거대한 태풍 앞의 나룻배 신세였다. 끝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총무원장이 속출했다.

이후 1994년 개혁종단이 들어서고 선거가 임박하자 개혁 세력이 선택한 카드는 송월주 스님이었다. 송월주 스님은 14년 만에 다시 ‘개혁’을 이끌어야 하는 선장이 되었다. 그리고 총무원장에 당선된 스님은 이제껏 누구도 실험하지 못한 교계 안팎의 개혁에 착수한다. 개혁회의가 정한 5대 지표, ‘정법종단의 구현, 불교 자주화 실현, 종단 운영 민주화, 청정 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 역할 확대’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총무원과는 별도로 승가교육을 책임질 교육원, 신도 포교를 진두지휘할 포교원을 설립했다. 소위 ‘삼원 분립’을 통해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병폐를 없애고, 종무 행정을 체계적이고 전문화하여 이에 따른 책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종단 고위직의 겸직 금지, 50명의 선거인단 300명으로 확대 등도 추진하였다. 절대 권력의 탄생으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한 시도였다.

한편 출가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스님이 되던 관행도 과감하게 바꿨다. 승가고시 제도를 통해 승려에게 법계를 부여하는 제도도 안착시켰다.

그 와중에 절에 적을 두고 있지 않은 3,000여 명의 승적을 절차를 밟아 정리했다.

안에서의 개혁뿐만 아니었다. 불교계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일은 어떤 사업보다도 빛났다.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다. 불교가 산중에만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는 스님의 오랜 지론은 종단의 관심사를 밖으로 돌리는 데도 일조했다.

사찰의 사회 참여 일환인 ‘자비의 탁발운동’, 의식계몽운동인 ‘초발심으로’ 등의 캠페인이 잇따라 펼쳐졌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의 출범도 이맘때다.

1995년 118곳의 불교복지시설을 묶어냈고, 2016년 현재 1,000여 곳으로 늘어나는 계기가 됐다.

종단 안팎으로 이전까지 누구도 실천해 보지 못한,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변화들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 송월주 스님이 있었기에 불교계에서는 과감하게 송월주 스님 이전의 종단과 이후의 종단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임기는 1998년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스님의 사회적 실천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울타리를 넘어섰다고 할 만큼 왕성했다. 나눔의 집 활동과 지구촌공생회 활동이 대표적이다.

2003년 10월 발족한 지구촌공생회는 빈곤 국가의 어린이와 주민들을 위한 국제 구호 활동에 전념하는 단체다. 캄보디아, 라오스, 몽골, 미얀마, 네팔, 케냐에 지부를 개설해 활동가를 파견하고, 식수 지원과 교육, 지역 개발을 돕고 있다. 그 결과 캄보디아를 비롯한 각국에 2,307곳의 우물을 만들어 생명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58곳의 초중고를 건립해 교육을 통한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또한 후원 회원은 창립 3년 만에 1,000명이 넘었고, 지금은 15,000여 명이 회비를 내며 지구촌공생회 활동을 하고 있다.

팔순이 훨씬 넘은 세수에도 스님은 사찰에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시간만큼 라오스의 초등학교를 짓는 현장에,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는 현장에, 케냐의 밭에 씨앗을 뿌리는 현장에 더 자주 모습을 보였었다.

개원과 함께 한 번도 중단하지 않고 이끌어 가고 있는 나눔의 집 활동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미 20여 년을 훌쩍 넘겨 버린 할머니들과의 교감은 역사의 피해자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고 있다.

“때론 종단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겠다”

회고록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한 쓴소리들도 많이 담겨 있다. 오도송과 임종게에 대한 일갈이 대표적이다. 생전에 오도송을 전한 적도 없고, 임종게를 직접 남기지도 않았는데, 입적 후에 오도송과 임종게가 발표되는 현실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또 종정은 법통의 상징이어야 하며, 종단 운영의 실무 중심에 총무원장이 자리하는 것이 종단 안정을 위한 큰 틀이라는 오래된 소신에 대해서도 말한다.

때론 사회에 보내는 목소리도 따끔하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 이외에 남북 문제에 있어서 휘둘리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시민사회운동은 도덕성을 그 뿌리에 두어야 한다며 시민운동 활동가의 원칙 없는 정치 참여나 일부 도덕성 문제를 질타하기도 한다.

세상이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평소 스님이 보여준 진심이 담긴 행보 때문이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묵직하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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