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7년 홍계희가 문과 급제한 시험 답안지 처음으로 공개

[과거 시험 답안지 ‘시권’을 알고보니]한국학 호남진흥원, '조선의 시권1~2에 전북 17명의 답안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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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 홍계희가 문과 급제한 시험 답안지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신분제 사회’라는 고정관념과는 달리, 조선시대는 ‘과거’ 제도를 통해 개인의 경쟁과 능력주의를 장려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광종 때 처음 도입돼 조선시대에 자리잡은 ‘과거’ 제도는 이런 전통의 핵심이었으며, 과거 시험 때 제출하는 답안지, 곧 ‘시권(試券)’은 조선시대 ‘파워 엘리트’들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편집자



한국학 호남진흥원은 '조선의 시권1~2(옮긴이 류호석, 배경옥, 송만호, 김봉곤, 편집 제작 흐름)'를 펴냈다.

이 책은 호남 인물들이 써낸 72편의 시권이 선보인다. 이 가운데 김제 여창문(呂昌文), 고산 임운(林芸), 남원 정염(丁焰), 김제 유즙(柳楫), 전주 홍계희(洪啓禧), 고창 유동휘(柳東輝), 부안 김정수(金鼎秀), 부안 고대진(高大鎭), 남원 정원귀(鄭元龜), 고부 유수함(柳壽咸), 고부 김정(金珽), 전주 이창수(李昌壽), 남원 방태연(房泰淵), 전주 이득종(李得宗), 전주 이하제(李夏濟), 전주 류원성(柳遠聲), 안극효(安克孝) 등 17명이 전북 인물이다.

유즙이 19개로 가장 많았으며, 임운 3개, 그리고 정염 등 나머지가 1개로 확인됐다.

홍계희 시권은 이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김제출신인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 1703-1771)는 1737년(영조 13년) 별시 문과의 장원급제자였다. 하지만 그가 죽은지 6년후인 1777년(정조 원년) 홍계희의 아들이 홍인한, 정후겸 등과 함께 은전군(恩全君)을 추대하다가 발각돼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홍계희의 관직이 추탈되는 일이 발생 그가 작성했던 모든 시권의 원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홍계희가 급제를 받을 당시 제출한 시권 내용을 누군가가 옮겨 적어 둔 까닭에 이번에 처음으로 찾아 번역했다.

당시 그가 받은 시제는 '양역지폐단(良役之弊端)'이었다. 다음은 시권 내용의 일부다.



'신이 삼가 성책(聖策)을 “그대들 제생”부터 “대책(對策)을 올리게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까지 읽었습니다. 신이 두 손으로 받들어 무릎을 꿇고 읽으니 마음이 더욱 벅차올랐습니다. 신은 미진한 소회를글 마무리에 거듭 고하기를 청합니다. 신은 전하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과 주(周)나라의 제도를 회복하는 것을 오늘날 양역(良役)의 근본을 바로잡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문왕 무왕의 시대에 만약 주공(周公)·소공(召公)·필공(畢公)의 무리가 옆에서 도와주지않았다면 역시 그 임금을 잘 인도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를 다할 수 없고, 각기 힘을 다하여 토지제도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신하 중에 과연 주공 · 소공·필공과 같은 자가 있습니까? 아! 전하의 신하들은 양역의 폐단을 정돈하지 않고 인순고식(因循姑息)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더구나 크게 진작시키고 대대적으로 시행하여 선왕의 아름다운 법을 회복하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백석(白石) 유즙(柳楫, 1585~1651)은 당시 김제지역의 대표적 유림이었다.

그는 김제 수곡 출신으로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며, 병자호란 때 창의, 출병한 충의로운 학자로, 최명룡·김장생의 문인으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인조반정 후 김장생의 천거로 오수찰방(獒樹察訪)에 제수됐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유도와 함께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며 창의했다. 1626년 청나라의 사신이 조정에 왔을 때 운암(雲巖) 이흥발(李興&;) 등과 더불어 이를 참수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도·이흥발 등과 함께 창의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和議)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귀향했다.

그가 쓴 '병식(兵食)'의 시권은 작성 연대가 나오지 않는다. 일부를 소개한다.



'"천하가 사슴을 쫓듯" 각축전을 벌일 때는 백성은 정해진 주인이 없었습니다. 백성은 곧 천하의 백성이었으며, 한나라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은 곧 천하의 재물이었지 한나라의 재물이 아니었습니다. 관련의 달리는 안정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설령 백성을 징발하여 병사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백성은 한나라에 원망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는 소비되어 식량으로 알았지만, 백성들은 한나라에 원망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성상의 백성들이며, 재산은 모두 성상의 재산입니다. 백성들은 힘들면 성상을 원망하고, 재산이 고갈되면 성상을 한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함부로 백성을 부리거나 함부로 재산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아, 오늘날의 어려움은 한나라 때의 어려움보다도 더 심함이 있으나, 군사와 식량을 주관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 중에 *소하(蕭何)와 같은 현명한 인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위로는 사직을 위하여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삼가 답합니다'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소하(蕭何)다. 패군(沛郡) 풍현(豊縣) 사람으로 친구 유방이 기병할 때 자금을 대줬고, 초패왕 항우와의 힘겨운 7년 전쟁에서 운송보급로 확보와 요충지 관중 방어로 유방의 걱정을 크게 덜어주었다. 유방이 항우를 이겨 진나라에 입성할 때도, 소하는 남들이 거들떠 보지 않던 승상부(丞相府)와 어사부(御史府)의 법령과 도서를 입수, 요새 위치와 인구 등 진나라 제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 고조의 천하경영에 힘을 보탰다. 법률에도 밝아 진나라 법률을 모태로 법률서인 '구장률(九章律)'도 썼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매서웠다. 한신(韓信)이 말 실수로 눈밖에 나서 갖은 홀대를 겪다 참지 못해 도망치자 그를 끝까지 따라가 다시 데려왔다. 그깟 형편없는 자를 쫓아갔느냐는 고조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로 한신을 천거했다. “여러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으나 한신과 같은 자는 나라의 둘도 없는 선비입니다. 왕께서 한중의 왕으로만 만족하신다면 한신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반드시 천하를 놓고 다투려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함께 일을 꾀할 사람이 없습니다. 왕의 생각이 어느 쪽에 있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諸將易得耳. 至如信者, 國士無雙. 王必欲長王漢中, 無所事信;必欲爭天下, 非信無所與計事者. 顧王策安所決耳. 사기 ‘회음후열전’)



소하 덕분에 한신은 과거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수모와 마을의 빨래하는 아낙들에게 밥이나 빌어먹던 처지에서 신분이 수직상승, 목욕재계한 경건한 모습의 고조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훗날 일등공신 반열에 들었다. 소하라고 벼슬길이 순탄하기만 했을까. 문관이어서 도필리(刀筆吏)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설치는 무관들 틈에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소하를 가장 강력하게 견제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조였다. 고조는 본거지 관중을 비우고 전쟁을 하다 보니 혹시 소하가 모반을 일으킬까 의심이 들어 사신을 보내 위로하는 척하며 감시했다. 소하는 포생(鮑生)이란 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자식과 형제들을 고조에게 인질로 보내 재신임을 얻게 된다. 결국 그는 장량이나 한신 등 200여 명의 개국 공신 중에서 야전 사령관 조참(趙參)을 제치고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

소하는 다른 2인자들 아니 2인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과 그릇이 달랐다. 사람과 일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고, 직언에 귀 기울일 줄 알았다. 때로는 권력자의 역린을 건드릴 정도의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권력자의 견제 심리를 간파해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자신의 모습을 가렸다. 죽는 날까지 2인자로 남았고, 그 후광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남다른 안목과 소신, 청렴과 처신의 권력 2인자 소하가 새삼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이뤄졌다. 이중에서도 문반을 뽑는 문과가 과거의 핵심이었다. 문과에는 경전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생원시’와 문장 짓는 능력을 평가하는 ‘진사시’가 예비고사 성격인 ‘소과’였고, ‘소과’ 합격자에겐 ‘대과’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다. 3년마다 치러지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의 경우 ‘초시’-‘복시’-‘전시’ 세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급제자를 선발했다. 식년시 이외에도 왕의 즉위, 원자의 탄생 등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이유로 다양한 이름의 부정기적인 시험이 치러지곤 했다.

고시과목은 모두 15종류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묻거나 어떤 사안에 대한 논변을 펴게 하거나 시나 부를 짓게 하는 등 다양한 형식이 있었다. 경학에 대한 이해, 역사와 문학을 비롯한 다방면의 학식과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 관료로서의 덕목 등을 평가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문치주의’를 강조한 조선 사회의 성격이 드러난다.

예컨대 정조 때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친시’를 치른 다산 정약용은 “다섯 종류의 새(‘오객’)를 소재로 글을 지으라”는 문제를 만났다. 그는 흰 꿩, 공작, 앵무새, 학, 백로 등의 새들을 각기 다른 성격의 인재에 비유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시권을 제출했다. 숙종 때 생원시에 응시한 이수담은 '예기'에 나오는 ‘백성의 힘을 쓸 때에는 한 해에 삼일을 넘지 못한다’는 구절의 뜻을 풀이하라는 문제를 만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이 임금일 수 있는 까닭은 백성이 있기 때문이니, 임금이 백성을 부릴 때에는 ‘절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는 시권을 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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