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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이야기꽃]차 한 잔, 독을 풀어주는 마음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4월 30일 15시35분

며칠 전, 하동에서 여린 찻잎으로 덖음차를 만들어 가져왔다. 작은 봉지를 열자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부드럽게 말린 초록 잎사귀가 지리산 자락 바람결처럼 스친다. 조심스레 우려내어 한 잔을 마셨다. 그저 따뜻한 물에 풀린 잎일 뿐인데 마음이 고요해졌다. 혀끝을 맴도는 떫고도 부드러운 맛이, 이 거친 세상을 잠시 잊게도 해주었다.

‘차(茶)’라는 말은 ‘독을 풀어주는 풀’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맙다. 아픔을 덜어주고, 몸과 마음에 스민 독을 천천히 씻어내는 존재라니,,, 그리 보니 차는 그저 음료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약이다. 찻잔을 건네주는 손은 삶을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약손이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독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간다. 물리적인 병보다도 더 깊숙이 파고드는 병이다. 그건 바로 정신적 피로,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상처, 그리고 공동체가 잃어버린 온기다. 하루하루가 버거운 사람들,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사회, 경쟁과 분열로 얼룩진 풍경 속에서 우리는 지쳐간다.

이럴 때야말로 바로 ‘차 한잔’이 필요한 순간이다. 단지 목마름을 풀어주고 적시는 차가 아니라, 마음을 씻어주는 차다. 혼자 마시기보다, 함께 마실 때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지는 그 따뜻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앉아 나누는 이야기,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는 그 순간조차도 적지 않게 위로가 되는 시간의 연출이다.

하동의 여린 찻잎은 어느새 성숙해져서 한 잔의 차로 내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손에 쥔 찻잔의 온기가 서서히 전해지고 퍼져나가듯,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독을 덜어주는 풀 한 줌이 되고, 찻물이 되어 마음을 적시는 존재.

차를 만들 때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차를 만들었다면 차 맛이 좀더 다르게 우러날까? 누군가의 아픔을 생각하며, 그 사람의 하루를 헤아리며 만들다니,,, 그러고는 그 차를 함께 나눈다.

오늘도 고단했을 누군가에게, 이름도 모르는 이웃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이 한 잔으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를 기원하는 맘을 담아 덖고 말리고 바람을 쐬어주며 땀 흘려 정성을 빚는분들이 있다. 더 웃자라기 전에 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바심을 대던 스님의 마음이 딱 이랬을 것 같다.

차는 단순히 물로 목넘김을 즐기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느림이고, 기다림이다. 잎이 물을 만나 서서히 자신의 빛깔과 향기를 내어주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가는 시간나눔이다. 급히 판단하지 않고, 빠르게 끊어내지 않고, 충분히 기다리는 것. 그 우러 내는 시간예술이다.

차는 말 대신 마음을 전할 수 있다. 어떤 위로는 말보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그럴 때 차는 사랑이 되고, 공감이 되며, 상처를 덮는 부드러운 ‘바람 이불’ 한 자락이 된다. 한 잔의 따뜻한 차는 우리가 서로를 향해 보낼 수 있는 가장 순한 방식의 다정함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독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혐오와 무관심, 불신과 냉소가 틈만 나면 고개를 쳐들고 나온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무뎌지고 냉정해진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초봄에 산비탈을 찾아가 풀을 따서 차를 만들며 자신과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 그 차를 함께 마시며 고요한 산사에서 이야기 꽃으로 ‘맑고 밝은 사회’를 스케치해 볼 수도 있다. 하동에서, 사천에서 그런 시간을 충전하고 오니 내 앞 시간들의 가시거리가 확 트였다.

한 사람의 마음이 먼저 움직이면, 그 울림은 또 다른 마음에 닿는다. 그렇게 따뜻한 찻물처럼 번져가며, 하나둘씩 독을 씻고,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지 않다. 누군가의 손에 찻잔 하나를 건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진심을 담는 것이다. 예전에 큰 칼 찬 장군들은 작은 찻잔을 들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우리의 하루는 어떠한가. 혹시 너무 많은 것에 지쳐버렸다면, 조용히 찻잎 몇 조각 꺼내어 물을 부어보자. 그리고 천천히 우려내 보자.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그 사람과 이 차를 함께 마셔보자. 당신의 다정함이 그에게 작은 해독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차 한잔 나눔으로 독을 푸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차 한 잔의 온기로. 아주 작은 잎 하나의 힘으로. 차는 오늘도, 우리가 잃어버린 온기를 우려낸다.

/이흥재(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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