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요즘 잘 살고 있니?” 어느 날 문득, 오래된 액자 속 문구처럼 이 한 문장이 마음 한쪽에 걸렸다.
‘잘 산다’는 말. 참 익숙하지만 늘 모호하다. 누군가에겐 돈이고, 또 다른 이에겐 평온이며, 혹은 이름 석 자를 남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게 그 말은 안개 같았다. 가까이 다가서면 금세 흩어져 버렸다. 그 질문을 품은 채 살아가던 어느 일요일, 문득 창밖에서 들려오는 삽질 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옆집 할아버지가 밭고랑을 다듬고 있었다. 삽이 흙을 가르는 소리가 낮게 울렸고, 햇볕에 그을린 목덜미가 땀에 젖어 반짝였다. 그때 마침 길 건너로 노부부가 지나갔다. 등산복 차림의 보라색 바람막이와 노란 모자가 봄꽃처럼 선명했다. 흙 묻은 할아버지의 작업복과 묘하게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삶을 “힘든 노동”으로 단정 지은 나.“휴일에도 저렇게 일에 파묻혀 있는 저이의 삶은 행복할까” 내 머릿속의 ‘잘 사는 노인’은 손주들과 놀며 웃는 사람이었다. 가족의 웃음소리가 흐르는 거실, 평온한 나날. 그것이 내가 아는 ‘행복의 표준형’이었다. 어느새 옆집 할아버지의 삶을 나만의 틀 안에 가두고 있었다. 그런데 커피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창밖을 봤을 때, 예상치 못한 장면과 마주쳤다.
할아버지가 흙 묻은 손으로 막 돋아난 풀잎을 살며시 쓰다듬더니, 고개를 들어 햇살을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참 낯설게 따뜻했다. 수고 끝에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니라, 그냥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이 좋아서 나오는 순수한 웃음.순간,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마음을 건드렸다. 그는 단순히 땅을 일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흙을 만지며 생명을 돌보는 사람, 그 손끝에서 감사가 자라나고 있었다. 옆집 할아버지의 미소 속에서 뜻밖의 평화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동안 얼마나 쉽게 남의 삶을 평가하며 살아왔던가.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건 좀 비효율적인데.” 내 기준 하나로 세상을 재단하던 내게, 그 웃음은 말없이 속삭였다. 진짜 ‘잘 삶’이란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충만함에서 비롯된다고. 흙 위에서의 하루지만 스스로 충만할 수 있는 순간이야말로 누군가에겐 인생의 정답일 수 있다고.
그 장면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돌이켜보면, 무의식중에도 타인의 말투 하나, 외모 하나에도 나만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섣부른 판단 앞에서 나를 멈춰 세우려 노력하고 있다. 다른 이의 삶을 보며 '왜 저렇게 살까?'란 생각이 스칠 때면, 이렇게 되뇐다. "그럴 수도 있지. 나랑은 달라도, 저 사람에겐 그게 옮음일 수 있을 거야“
삶은 공식을 대입하는 수학 문제가 아니다. 각자가 자기 문장을 써 내려가는 서술형의 여정이다. 누구의 삶이든 자기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고, 문장마다 다르게 피어나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채점자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
요즘 나는 ‘물음표의 삶’을 배우고 있다. 확신이 넘치는 세상에서 질문을 품고 산다는 건, 어쩌면 조금 느리고, 어리숙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은 틈을 만든다. 그 틈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생긴다. 다른 이의 삶 앞에서 마음속에 조용한 물음표 하나를 놓아두는 일. 그 작은 질문 하나가 세상을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든다. 말보다 묵음으로, 확신보다 질문으로, 단정보다 여백으로 사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진짜 어른의 얼굴일지 모른다. 인생은 정답을 찾아가는 시험이 아니다. 무언가를 증명하는 경주도 아니다. 그저 묻고, 걷고, 때로는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준다.
내 삶은 여전히 물음표로 가득하다.“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이게 잘 살아가는 길이 맞을까?” 한때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던 그 질문들이, 이제는 내 삶을 붙들어 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햇살 속에서 웃던 할아버지의 미소. 그가 남긴 따스한 물음표 하나가 지금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천천히 빛난다.
윤철 수필가는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현) 전북특별자치도문인협회 부회장
수상 : 전북수필문학상, 새전북신문문학상, 리더스에세이문학상 등 다수
수필집 : '칸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 가족은 안녕한가요', '나를 닮은 타인 그 이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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