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선교하는 제자 공동체’이다

스티븐 베반스 '선교하는 제자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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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하는 제자 공동체(지은이 스티븐 베반스, 옮긴이 권영파, 펴낸 곳 흐름출판사)'는 즉 교회의 정체성은 선교이며, 그 구성원은 제자이고, 구성 형태는 공동체라고 한다. 이때 교회는 실존적 의미에서, 명사나 형용사가 아닌 동사이다. 동사로서의 교회는 확정적 실체가 아니라 움직이고, 발전하며, 작용하는 실재이다.

이 지점에서 선교는 단선적 시야와 일방성에서 벗어나 ‘킨십’을 기반으로 하는 ‘킨덤’을 지향하게 된다. 킨십kin-ship은 저자가 혈연, 친족 등을 의미하는 단어 kin과 그러한 상태, 관계, 성질 등을 의미하는 단어 ship을 조합해 만들어낸 어휘이다. 곧 킨십은 근원적인 친밀함의 지향이다. 따라서 킨십에 기반한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적으로 패권주의와 관계가 깊은 어휘인 킹덤King-dom보다 킨덤kin-dom으로 나타내는 편이 어울린다. 이때 킨덤은 생명체 공통의 친밀함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의 감각을 지닌다.

저자는 킨십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로 예수의 활동을 든다. 사랑과 포용, 환대에 기초한 그의 활동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화해와 치유를 경험토록 하며, 공동체의 번영을 약속한다. 그러나 예수가 킨덤을 구현하고, 증명하며, 선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방인을, 원수를, 이웃을 포용하고 사랑하며 환대하는 일은, 나아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두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도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킨십은 급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킨십으로 선교하는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나 정의된 실체가 아니다. 즉 교회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마주하는 신비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신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형태를 가진다.

저자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제자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두고 구조화한다. 이는 종래의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을 해체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례받은 선교사 제자’라는 점을 바탕삼아 다양한 직분을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특히 중요하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평등을 선언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선교적 본성을 심화함으로써 동사로서의 교회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성직자/평신도’ 이해가 그 역할과 책임을 한정함으로써 교회의 구조를 경직시켰다면, 세례받은 선교사 제자도에 기초한 이해는 선교라는 교회의 본성이 그리스도인 모두가 공유하는 킨덤의 성사임을 자각하도록 한다.

저자는 모든 신학은 ‘상황신학’이라고 단언한다. 이때 ‘상황’은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의미한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다문화적일 수밖에 없다. 다양한 맥락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근본적으로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동사이며, 킨덤이 도래하는 그날까지 ‘계속하여 창조되는 신비’이다.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태도는 열정과 성실함이다. 나를 알고 타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성실함, 함께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열정이다. 가톨릭 신부로서,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은 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다른 그리스도교를, 세상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그의 노력에는 “온 마음”이 담겨 있다. 오늘날 교회가 놓인 현실은 도전적이다. 그리고 이 도전은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혹자는 이 글이 충분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적지근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과연 이 글은 잘 벼린 날붙이 같은 서슬을 부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벽을 높이 쌓고 위용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관용은 이 온도에서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더욱이 저 온도가 온실에서 배양된 안온함이 아니라 노신학자가 만남과 만남을 거듭하며 터득한 황금률이라면 이 만남을 사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기’에 관한 신학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 글은 당장 증명할 길 없는 ‘청사진 교회론’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만남’에 관한 신학으로서 이 책을 읽는다면 가장 가까운 곳, 곧 내 마음에서 나침반처럼 기능하는 신학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사가 제로섬 게임이라도 되는 양 절박하고 절박하여 그저 내달릴 뿐 타자의 사정 따윈 살필 여유가 없는 듯 보이는 지금, 우리는 때로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가리키는 손끝에 걸려 넘어진다. “단일하지만 복잡한 현실”을 인정하고 ‘단일하지만 복잡한 실재’로서 서로를 대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은 모노톤에서 벗어나 보다 다채로울 터, 그 풍요로운 세상이 바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창조의 완성, ‘킨덤’ 아닐까./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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