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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1월 24일 14시57분

[금요수필]경전 답설(慶殿 踏雪)

정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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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엊저녁부터 밤새도록 첫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얀 은세계로 바꿔 놓았다. 어쩌지? 오늘 내 출근인데, 눈길에 나갈 일이 망설여졌다. 눈길의 악몽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입대한 아들이 논산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계룡대 육군본부에 배치됐다. 그래서 친정아버님 기일 전주에 내려갔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면회를 했다. 그런데 바로 옆 공군부대에 같은 교회 장로 아들 신혁이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내 아들은 바로 면회했는데, 그는 단체관람 영화를 보러 가고 없었다. 부대 앞에 우두커니 두 시간을 기다리자니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그냥 갈까? 망설이다 이왕 산 치킨을 도로 들고 갈 수도 없어 기다리기로 했다.

겨울 날씨라 금방 날은 어둡고 눈까지 내린다. 부대 근처 유성온천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하얗게 쌓였다. 유성을 출발하여 청주 근처 고갯길을 올라 내리막길을 보니, 눈길에 미끄러진 차들이 여기저기 넘어져 있다. 조심조심 달리고 있는데, 트럭이 갑자기 끼어들어 급브레이크를 밟으니 내 차가 빙그르르 돈다. 대형사고의 현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차가 그대로 멈춰 서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차는 옆 계곡으로 빠진 것이 아니라, 한 바퀴 돌아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서 있었다. 범퍼에 약간 부딪힌 흔적만 남겼고, 사람도 자동차도 멀쩡해 다행이었다. 아찔한 순간에 큰 사고 없이 돌아왔지만, 그때의 악몽 때문에 눈이 오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어쩌다 눈이 오면 눈길 운전을 포기하고 길가에 주차해 놓고,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부터 하고 택시를 타고 귀가했었다.

오늘, 절박함은 없었지만, 책임감은 다 해야 하는 자원봉사자이기에 용기를 내어 집을 나섰다. 내 차는 SUV 사륜구동이라 약간 안심하고 차를 몰아 한옥마을 주차장에 넣었다. 은행로를 지나 태조로를 걸으며 내 선택에 만족하고, 하늘의 축복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눈[雪]길을 밟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걷는 길이지만, 오늘은 눈이 소복이 쌓인 한옥 지붕과 눈꽃을 피운 나무들, 젊은 연인들의 골목길 눈 장난에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췄다.

내 고향 시골 마을 나지막한 초가지붕은, 눈 이불을 소복이 덮어쓰고, 처마 끝엔 주렁주렁 고드름을 달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손등이 터져 피가 나고, 옷이 다 젖도록 온종일 놀다 보면 내 머리칼엔 작은 고드름이 송송 맺혀있고,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집에 들어가면 따뜻한 구들장 아랫목 이불 밑에 두 손 꽉 잡아 넣어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이 더없이 좋았었다.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다. 눈이 와도 골목길은 물론 놀이터조차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부모들의 원천봉쇄도 있지만, 아이들의 정서도 안전한 놀이에만 익숙한 까닭이리라. 첫눈의 낭만과 추억을 되뇌며 걷다 보니 경기전 정문에 들어섰다. 순간, 경기전 설경은 한 폭의 한국화, 나도 신선이 되어 너무 아름다웠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행운의 순간이었다. 경전 답설, 한옥마을 10경 중 하나인 바로 이 모습이지!



정남숙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등단

수필집: ‘노을을 닮고 싶다’ ‘난 아직도 꿈을 꾼다', ‘역사의 마당에서 전통이랑 놀아보자’

‘대한문학 작가상’, ‘올해의 수필인 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선정, ‘올해의 수필인 상’ 수상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 행촌수필, 은빛수필 회원.

국립전주박물관, 전주기독교역사기념관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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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1-2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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