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편의 소설에는 공통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
'힘내는 맛(지은이 최민우, 펴낸 곳 문학동네)'은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으로 무뎌져버린 당신의 미각을 두드릴 일곱 가지 달콤씁쓸한 맛을 잘 보여준다. 2012년 등단 당시 “이토록 강력한 실감과 생기 넘치는 인물들을 만난 건 몹시 오랜만”(소설가 권여선)이라는 평을 받으며 범상치 않은 작가의 등장을 알린 최민우는 핍진한 현실 묘사와 정감 가는 인물들, 그리고 반전이 있는 환상적 장치들을 통해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끌어왔다. 이번 소설집은 훨씬 더 능숙하고 대담해진 최민우의 서사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과 고요한 풍경 이면에 숨어 있는 반전이 돋보인다.
이번 소설집에 엮인 일곱 편의 소설에는 공통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업사원, 번역가, 계약직 사원, 자유기고가, 연구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특출한 능력을 가졌거나 높은 급여를 받는 인물들이 아니다. 이들은 코로나 때문에 직장에서 무급 휴직을 당하거나('변함없는 기분') 함께 일하던 후배가 그만두는 바람에 마음의 동요를 겪거나('가을의 곡선') 출장지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곤란해하는('힘내는 맛'), 우리가 출근길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이 겪는 실패와 좌절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우리가 그렇듯 인물들 또한 그들이 마주한 벽을 드라마틱하게 넘어서지는 못한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슬픔을 과장하지도 회복을 단언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최민우는 우리에게 뜻밖의 진실을 일깨워준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몫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평범하지만 분명한 위로를 주는 그 진실을 말이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우주의 먼지'는 영업사원 한철이 우연히 연극을 배우면서 시작된다. 거래처 직원로부터 표정이 딱딱하다는 지적을 받은 한철은 그걸 고치기 위해 연극을 배우게 되고, 뜻밖에 연극 수업을 받는 동안 그간 경험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낀다. 평소 회사일과 가족에 얽매여 살아온 한철은 연극을 하며 무대 위에는 자신뿐임을 인식하고 비로소 자유롭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는 연극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둘 결심까지 하지만, 공연장에 가족들이 찾아오면서 그의 꿈은 산산히 부서진다. 한철은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즉 “자기가 가질 뻔했던 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34쪽)아챈다. 달콤하기만 했던 한철의 꿈이 현실의 침입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가족이라는 족쇄에 얽매인 인물은 또 있다. 표제작인 '힘내는 맛'의 경완은 인문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동료이자 연인인 상아와 함께 유학을 가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경완이 유학 자금으로 모아둔 돈으로 형을 도와야 한다고 다그”(208쪽)치면서 경완의 꿈 역시 흩어져버린다. 유학을 포기하고 상아와도 멀어진 뒤 복잡한 마음으로 출장길에 오른 경완은 먹고 싶지 않은 점심 메뉴를 먹게 된 상황에서 “스스로의 의지에 관계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때”(207쪽)가 있다고 자조하는데, 이는 가족이라는 족쇄에 묶여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억누르는 경완의 현재 상황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보라색 사과의 마음' 속 은영 또한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출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은영은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이후 무너져버린 부모님 대신 “상황을 파악하고, 장례를 치르고, 공판에 참석하는”(43쪽) 일들을 처리하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은영에게 “어느 순간 댐이 무너지듯 슬픔이 밀려올 거라고”(44쪽) 말하지만 은영에게는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동생의 마지막 순간을 계속해서 되짚으며 수수께끼로 남아버린 단 몇 분의 상황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은영은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약도 처방받아 먹는 아버지와 달리 이 슬픔을 극복할 수 없다. 슬픔을 느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을의 곡선'의 진송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진송은 자신과 절친했던 동료 혜진의 갑작스러운 이직 통보에 서운함을 느끼지만 그 감정을 부인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 모든 것이 이유일 수도 있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아닐 수 있었다”(104쪽)며 자신이 느끼는 서운함을 외면한다. 코로나로 무기한 휴직을 당한「변함없는 기분」 속 상진도 그렇다. 상진은 휴직중 회사 대표의 연락을 받는다. 회사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의 진행자였던 윤미 선생이 자신의 SNS에 회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면서, 윤미 선생에게 그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이다. 상진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대표의 부당한 요구를 전하기 위해 윤미 선생을 찾아가 그녀를 설득한다. 불편한 자리에서 돌아온 상진은 “외로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닌 기분”(93쪽)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상진의 막막한 상황을 떠올려보면 그는 지금 외롭고 슬프고 괴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진을 비롯한 인물들은 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걸까.
이들은 모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진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무감해지려고 함으로써 일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의 의도된 무감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절망을 절망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이들의 평안한 일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거짓 감정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반복되는 삶에서는 매일 같은 맛이 난다. 좀더 ‘맛있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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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4-2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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