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12월 18일 15시08분
[금요수필]동지팥죽
신팔복
팥죽은 여느 때보다 동지에 먹어야 제맛이 난다. 따뜻함으로 차가움을 막아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쫀득한 새알심을 씹고 신건지 국물을 떠먹어야 개운한데, 겉절이에 생채뿐이라 옛날 입맛이 아니다. 몸이 따뜻해짐을 느끼며 한 그릇을 비웠다. 이제 겨울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동짓날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과 함께 밀린 사친회비를 받으러 가정방문에 따라갔다. 이집 저집에서 팥죽을 쑤느라 한창이었다. 산언덕으로 난 길을 올라가 친구네 초가집 좁은 마당에 도착했다. 짚으로 엮어 매단 부엌문을 밀치고 친구 어머니가 나왔다. 바가지에 담긴 팥죽을 수저로 여기저기 뿌렸다. 벽에 달라붙은 팥죽에서 김이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하도 우스워 마구 깔깔거렸다. 왜 그렇게 뿌리는 것인지 몰랐다. 갑자기 닥친 일에 당황한 친구 어머니는 팥죽 바가지를 냉큼 놓고 나와서 선생님과 인사를 했다. 선생님이 말씀을 끝내고 나오실 때 우리는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그 뒤로 몇 집을 더 다니고 가정방문을 끝냈다.
눈발이 살살 날리던 추운 날씨였다. 얼른 집에 가서 팥죽을 먹으려는 생각으로 오리가 넘는 길을 친구들과 뛰다시피 걸어왔다. 동구 밖 당산나무에는 새로운 금줄이 쳐져 있었다. 어른들은 풍물을 치고 팥죽을 끓인 아주머니들이 작은 옹배기에 이고 나와 빌고 간 흔적이 있었다. 정갈하게 짚을 깔고 그 위에 팥죽을 뿌려 놓았다. 집에 도착하니 장독과 마당, 조왕(竈王)에 팥죽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마당에 서서 사방으로 절을 하며 두 손을 모아 빌고 계셨다. 한 해를 무탈하게 넘긴 것에 감사하며 내년의 가족 건강과 풍년 농사도 기원하는 듯했다.
동지팥죽을 쑤면 우선 성주, 조왕, 삼신에게 올려 동지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방과 마루, 마당 같은 여러 곳에도 한 그릇씩 떠 다 놓고 가족이 무병하기를 빈다. 팥죽을 뿌리는 것은 붉은색을 가진 팥이 액을 막고 잡귀를 없애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잡귀를 몰아낸다는 축귀(逐鬼)의 뜻이 담겨있다.
동지는 일 년 중에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로 우리 조상들은 음(陰)의 기운이 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성한 음의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양(陽)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을 쑤어 먹게 된 것이라 했다. 음식을 보약으로 알았던 조상들의 건강에 대한 지혜다. 팥죽엔 찹쌀가루로 만든 단자를 넣는데 새알 크기로 만든다고 하여 새알심이라 부른다. 새알심은 나이 수대로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작은 설로 불리기도 한 동지를 쇠면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내 어릴 적에는 팥죽을 집집이 쑤어서 이웃과 나눠 먹기도 했다. 추운 겨울철 훈훈한 정이 넘치는 시골의 풍습이었다. 동짓날에 날씨가 따뜻하면 다음 해에 질병이 많고, 눈이 오고 추우면 풍년이 든다는 말도 전해졌다.
지금은 팥죽을 쑤는 집이 거의 없다.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서구화되어 가는 생활상으로 바뀌어 우리의 전통 세시풍속이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훈훈했던 이웃 간의 인정이 가족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동지가 지나면 막바지 추위가 온다. 동지팥죽을 먹고 몸을 보양(保養)하며 긴 추위를 이겨낸 조상들의 지혜를 되새겨 본다.
신팔복 수필가는
한국문협 회원, 전북문인 이사, 전북수필 이사, 진안문협 회장 역임
행촌수필 부회장 역임, 영호남수필 부회장 역임, 은빛수필 감사역임, 문학상 2회 수상.
저서: 수필집 '마이산 메아리', '내 생활의 좌표계'
지면 : 2024-12-20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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