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1월 06일 08시16분
환대와 우정이 100년의 저주를 풀었다
[책마주보기]루이스 쌔커의 '구덩이'(하채현)
한편 제로를 만난 스탠리는 신의 엄지손가락을 찾아가 연명할 수 있었다. 힘을 얻은 둘은 캠프로 돌아가 스탠리의 구덩이에 있을 보물을 찾기로 한다. 립스틱 뚜껑이 발견된 구덩이가 스탠리의 구덩이이기 때문이다. 엑스레이가 대장이라서 스탠리는 캐낸 립스틱 뚜껑을 엑스레이(X-ray)에게 바쳐야 했고, 그 바람에 소장 일행은 엉뚱한 엑스레이 구덩이를 파댔고, 파도 파도 나오는 것들이 변변치 않자 아이들을 혹독하게 다루기 시작했었다.
여러분은 어릴 적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하는 일마다 생각과 다르게 진행될 때, 어머니의 잔소리가 참을 수 없을 때, 성적표를 받고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멋진 저 아이가 유독 나에게만 쌀쌀맞게 굴 때 말이다. 나처럼 착한 아이가 이런 일이 생길 이유는 오직 하나, ‘내게 저주가 씌워졌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적이 없는가? 나는 못된 마법사의 저주를 받았고, 언젠가는 저주가 풀릴 것이라는 사실은 어린 시절의 내가 고통의 일상을 견딜 유일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래서일까? 주인공 스탠리 4세가 겪는 고조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는 일”이라는 저주는 어쩐지 내게도 익숙하기만 하다. 이렇게 청소년소설 '구덩이'는 어른에게도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스탠리의 고조부인 스탠리 1세는 무녀에게 새끼 돼지를 받고, 다리가 없는 그녀를 신성한 산에 데려다주기로 하였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해양선을 타고 미국으로 와 버렸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결혼하려고 새끼돼지를 얻었는데 결혼에 실패하자 화가 나서 그만 무녀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이로써 스탠리 집안은 무녀의 저주를 받았다고 스탠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들으며 성장했다. 스탠리는 뚱뚱하고 못생겨서 데릭 던이라는 아이의 놀림감이다. 그날도 학교에서 데릭이 공책을 가로채어 가서 그것을 화장실에서 꺼내느라 학교버스를 놓쳤고, 그래서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때 머리 위로 날아온 운동화를 아버지에게 가져갔다는 이유로 운동화 도둑으로 지목되어 초록호수캠프로 오게 되었다.
초록호수캠프에는 초록도 없고 호수도 없다. 처음부터 초록호수캠프에 초록호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연이 있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마을 선생님 케이트 바로우가 흑인을 사랑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강 건너 사는 양파 장수 그 흑인이 초록호수를 건너는 동안 총살하자, 케이트 바로우는 마을에 ‘저주’를 내리고 서부의 무법자가 되어 버린다. 스탠리 4세가 초록호수캠프에 도착하기 10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렇지만 ‘초록호수캠프에 초록호수가 없다’라는 '구덩이' 첫 문장에서 나는 “당연한 일”이라고 느꼈다. 구호뿐인 현실을 볼 때 당연하지 않은가? ‘활기찬 마을’에는 활기가 없다. (활기가 필요해서 활기찬 마을이라고 썼다) ‘화목한 가정’은 화목하지 않고, ‘공정한 법률’은 공정이란 찾아보기 힘들고, ‘자율적인 교육’에 자율성이 부족하기만 하다. 실체 없는 현실, 보여주기식. 사실은 너무 부족해서 필요한 것을 대체로 명사 앞 형용사로 붙인다. 초록호수캠프는 초록호수에 있는 걸스카웃캠프가 아니라 소년원이다.
이 소년원에 들어오면 이름을 빼앗기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구덩이를 하루에 하나 파야 한다. 아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한 명목이다. 아이들이 이름이 없다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 것이어서 여기에서는 나이도, 인종도 무의미하다. 있는 것은 물리면 곧 죽는다는 노랑눈 도마뱀과 방울뱀, 전갈뿐이다. 운동화를 훔친 죄로 소년원(초록호수캠프)에 들어온 스탠리는 원시인으로 불린다. 스탠리가 구덩이를 판 후 저녁 시간에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제로(Zero)와 연결된다.
원시인은 제로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고, 대신에 제로는 원시인의 구덩이 파기를 돕는다. 여기에는 ‘용서’라는 인간적 활동이 작동한다. 원래 제로가 원시인에게 접근한 이유는 자신이 운동화를 훔친 범인이기 때문이다. 제로는 원시인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다. 원시인은 제로를 용서하고 친구로 받아들인다. 둘의 우정은 서로의 환대로 성사된다. 그리고 둘은 힘을 합쳐 스탠리 증조부의 보물 가방을 찾는 데 성공한다.
가방에는 ‘스탠리 욜녜츠’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스탠리 집안은 조상의 가방을 찾아서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난다. 환대와 우정이 백년 저주를 풀었다. 을사년 새해에는 ‘환대’와 ‘우정’으로 우리에게 붙어 있을지 모르는 백년 저주를 풀어보자.
하채현 작가는
생태에세이 '수수에게 들키다' 저자
우석대 국어교육과 교수
베트남한국어교육공부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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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1-07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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