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2월 13일 15시52분
[금요수필]함박눈 서정
소리 없이 날리며 서로 엇갈리는 움직임이 희롱질 같다. 눈의 춤이다. 안무 없이 추는 눈의 춤은 자연의 고요한 리듬이다. 자유분방한 동작은 있지만, 소리는 없다. 스텝 밟는 소리조차 허용되지 않는 탓인지 어둠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춤 선이 너무나도 고요하다. 그 조용한 움직임이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며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한 듯 고요의 깊이를 더 한다. 눈 춤의 공연이 밤새 이어졌던지 창밖의 세상이 온통 하얗게 덮여 있다. 눈송이는 하나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목숨을 다하는 것 같지만, 서로가 끌어안고 스미며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덮고 가려서 깨끗하고 청순한 새 세상을 만들어낸다.
나는 한동안 창밖의 새하얀 풍경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 한 발짝 첫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밭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하얀 도화지에 첫 붓질을 할 때와 같은 설렘과 기대가 솟구친다. 눈이 덮인 골목길에 발자국을 하나, 둘 찍을 때마다 들리는 뽀드득 소리가 고요 속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다.
걷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나만의 흔적인 발자국 위에 새로운 눈이 내리며 자국의 선명함이 흐려지고 있었다. 지나온 젊은 날, 내 삶의 흔적도, 숱한 기억도 새로움에 덮여서 지워지고 잊히고 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조차 없어지리라. 눈송이가 모여 눈밭을 이루듯이 인생이란 일상의 순간,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만들어낸다. 세상은 계속해서 돌아가고, 그 속에서 나는 숱한 기억을 만들며 세월을 쌓아간다.
즐거웠던 추억은 새벽이슬처럼 금세 사라지는데 아픔의 기억들은 늘 변하지 않고, 잊히지도 않는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 새로이 내린 눈에 덮여 흔적이 사라지듯이 가슴속에 옹이처럼 남아있는 아픔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잊히고 사라지겠지. 정답은 세월 속에 있는 것 같다.
온 세상에 새하얀 고요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빈 땅과 도로, 건물 지붕까지 온통 새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서기를 띄며 몽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눈은 꽃이 되었고, 쇠못 같은 전봇대 발판에 용케 올라앉은 눈은 삶이 옹색한 이들의 처지 같다. 하고많은 공간을 다 놔두고 하필 저곳에 자리 잡았을까?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눈에도 운이 있는가 보다. 머리에 눈을 담뿍 이고 서 있는 가로등은 깜빡거리면서도 어둠을 쫓고 흩날리는 눈발을 비추며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저 가로등이 우리의 삶 같다. 늘 깜빡거리고 흔들리지만 그래도 중심을 잃지 않고 견뎌내며 하루하루를 희망과 기대로 새롭게 시작하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닌가.
윤철 수필가는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수상 : 전북수필문학상, 새전북신문문학상, 리더스에세이문학상 등 다수
수필집 : '칸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 가족은 안녕한가요', '나를 닮은 타인 그 이름 가족'
(현) 전북특별자치도문인협회 부회장
□ 사 진
□ 작가프로필
〇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〇 (현) 전북특별자치도문인협회 부회장
〇 수상 : 전북수필문학상, 새전북신문문학상, 리더스에세이문학상 등 다수
〇 수필집 : 『칸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 가족은 안녕한가요』
『나를 닮은 타인 그 이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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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2-14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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