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2월 23일 13시51분
[온누리]앙시앵 레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조선 땅에 총성 하나 없었다. 일본의 치밀한 계략에 꼼짝달싹 못 하고 나라를 거저 내준 것이다. 더 한심한 것은 책임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오죽했으면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고도 한 사람도 책임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며, 독서와 저술에만 전념하던 시골 선비인 매천 황현이 자결을 했을까?
당시의 국가 상황을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양반들은 실질 없는 당파에만 목을 매고, 관리들은 백성들의 피를 뽑으려 혈안이고, 왕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국권을 다투다 결국 외세까지 끌어들였다. 이런 나라가 안 망하면 세상에 망할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낡은 제도의 모순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어지던 민란 속에 농학농민혁명으로 민중들이 일어섰다. 살기 위해 절박하게 들었던 죽창으로 집강소를 세우고, 사회 모순을 바로 잡아 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 실패로 끝났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게 프랑스혁명처럼 이어졌다면 국권을 침탈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앙시앵 레짐’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됐다. 앙시앵 레짐을 풀이하면 낡은 제도의 모순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절대 군주 체제나 무능하고 무기력한 정권을 일컫는 용어로 쓰인다. 당시 프랑스는 제1, 2신분인 성직자와 귀족이 전체인구 2%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국가 토지의 30%를 소유했다. 고액의 연금을 받으면서 세금은 내지 않았다. 모든 짐은 제3신분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졌다.
더구나 프랑스 왕실은 오랜 전쟁과 미국독립전쟁 지원 등으로 빚더미였다. 그러니 세금을 더 걷어야 했고,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린 삼부회의의 갈등이 결국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때 민중들이 썼던 삼색 모자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 ‘라 트리콜로르’가 됐고, 불렀던 노래가 국가 ‘라 마르세얘쓰’가 된다.
프랑스혁명이 인류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원이자, 기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혁명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앙시앵 레짐을 바로 잡으려는 선각자들이 있어 가능했다. 프랑스의 볼테르, 영국의 흄, 독일의 칸트 등이다. 이들을 일컬어 계몽주의자라고 한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현존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계몽주의자들을 진보적 엘리트라고 불렀다. 이들은 종교적 정치적 박해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며 민중들을 일깨웠고, 이런 정신이 인류 역사를 바꾸었다.
최근 계엄을 계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진보적 엘리트 정신인 계몽을 보수 인사들이 들먹인다. 정말 계엄이 계몽이라면 우리 국민을 어떤 방향으로 일깨우겠다는 것이며, 무슨 박해와 맞서 싸우라는 것인지 궁금하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인 앙시앵 레짐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계몽을 희화한 계엄 주도자와 옹호자들이야말로 스스로 앙시앵 레짐의 굴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이야말로 계몽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김판용(시인‧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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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2-2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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