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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4월 10일 15시26분

[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황희와 그 후손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있는 전북의 대표 서원들

28회 황희의 위패를 모신 전북 4대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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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창계서원 ----> 자료 출처: 장수군청



창계서원

장수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창계서원은 1695년(숙종 21년) 처음으로 방촌 황희를 배향하기 위해 창계사로 창건되었다가 1815년(순조 15년)에 증건하고 창계서원으로 확대 복설되었다.

대체로 서원은 선현의 연고가 있는 곳을 택해 설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수황씨의 뿌리가 있는 곳이자 황씨 가문의 계보를 이으며 정착했던 장수 지역은 황희의 본관이자 유배지로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황희를 모시는 일은 어쩌면 후손과 장수 유림이 마땅히 해야 할 과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창계사우 중수기」를 보면 “장수는 본시 황씨의 관향이며 황공이 유배하였던 곳인 황정들 또는 방촌들이 지금 장수 관할 내에 있어 그 선대의 유적지로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호남 선비들이 공의 제사를 장수에서 드리는 까닭이므로 아울러 기록하는 바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후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영정과 위패 등은 용진서원으로 옮겨졌다. 1892년(고종 29년) 당시 몰수되었던 원래의 논을 창계서원, 용진서원, 문중이 나누어 돌려받게 되었고 창계서원은 3두락을 돌려받아 제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옛 모습을 갖추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관리되지 못해서 무너져 내린 곳이 많았다. 이후 장수 유림이 1957년 상현계를 만들어 1958년 강당을 먼저 복원했고 정부 지원을 받아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창계서원은 전라북도지방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이곳에는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인 방촌 황희를 포함해 뇌계 유호인, 송탄 장응두, 무명재 강백진, 황희의 셋째 아들 열성공 황수신 5인 선현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풍계서원



풍계서원

1788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에 건립된 풍계서원은 황희와 맏아들 황치신의 후손 황위, 황희의 매형 오상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신 곳이다.

황치신은 아들 9명과 딸 5명을 두었는데 이중 다섯째 아들 황사효가 남원에 세거한 장수황씨의 집안 계통을 이으며 그의 증손 황진에게로 이어졌다.

황진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1593년(선조 26년) 6월 진주성에서 병마절도사 최경회 등과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황진의 충의는 그의 손자 황위에게 이어졌다.

황위는 1605년(선조 38년)에 7월 4일 남원 주포에서 태어났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수 황정직과 창의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아 1637년(인조 15년) 1월 공주에 도착해서 소모사 정홍명의 별장이 되어 과천까지 올라가 청나라 군사와 전투했다. 1652년(효종 3년) 평양서윤에 부임할 당시 병을 얻어 남원으로 귀향했다가 1654년(효종 5년) 4월 13일에 사망했다.





화산서원 내에 있는 황방촌영정



화산서원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 자리한 화산서원은 방촌 황희와 그의 둘째 아들 황보신, 황희의 5세손인 황징을 배향하고 있다.

황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사랑(문신 정9품)으로 참전해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 이등에 녹훈되었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4대조 할아버지인 황보신에 의해 형성된 경상도 상주의 세거지를 떠나 처가가 있던 이곳 백화리로 이주해 동족 마을을 형성했고 입향조가 되었다.

화산서원의 창건 시기는 문헌의 부족과 미비로 인해 1922년, 1927년, 1932년 설이 있는데 장수황씨 대종회가 간행한 『장수황씨사적』과 『귀후재』에 근거하면 1927년에 상량하고 단청을 거쳐 1932년에 준공한 설이 유력해 보인다.



화산서원 안에는 황희가 62세에 그린 초상화를 모사한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된 「황방촌 영정」은 1926년 조선 최고의 어진 화가로 알려진 채용신이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1926년 화산서원의 전신인 화산사를 건립해 황희를 배향하려 했던 장수황씨 문중은 영정을 모시기 위해 「황방촌 영정」을 보관하고 있던 상주 종인(宗人)을 찾아가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후손 황병일, 황대현이 채용신을 상주까지 모시고 가서 영정을 모사해 왔다고 한다.

가로 54cm, 세로 80cm 비단에 진채로 채색된 이 영정은 오사모(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를 쓰고 쌍학흉배와 각대를 갖춘 관복 차림의 반신상으로 콧날과 눈 주위에 음영을 더해 오목함과 볼록함을 표현했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수염을 세밀하게 묘사했고 관복의 옷 주름은 비교적 강한 선으로 표현해 선명도를 높였다. 이 초상화는 모사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산서원의 「황방촌 영정」은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어 2017년 보존 처리되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 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그때 만들어진 복제품이다.





열성공 황수신 부조묘





용진서원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에 자리 잡은 용진서원은 장수군 창계서원과 같이 황희와 셋째 아들 황수신을 배향한 곳이며 후에 김맹(조선 초기 공신이며 문신), 이익, 강이온(조선 중기 문신), 박금(조선후기 문신)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 서원은 1680년(숙종 6년)에 건립되었다가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그 후 1922년 지방 유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곳 구억마을 입구에 복원하게 되었다.

서원 뒤쪽 내삼문을 지나면 용지사가 나오는데 이곳에 황희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황희, 황수신을 비롯해 4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구억마을 안에는 용진서원 부속으로 열성공 황수신의 부조묘가 있다.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두고 계속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허락된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라고 한다.

이곳에서 황수신의 후손들은 수백 년간 제사를 모셔 왔는데 1983년 6월 황수신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선산 옆으로 부조묘를 옮겨가게 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장수황씨 열성공파 후손들은 1907년, 이 마을에 다시 부조묘를 건립했다. 2013년 9월에 중수했고 2020년 6월부터 보수 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꾸준히 관리해 오고 있다.

건물 왼쪽에는 정부인열녀안동김씨지려비각이 세워져 있다. 황희의 5대손 황락의 아내 안동김씨가 임진왜란 당시 왜장에게 손목을 잡히자, 장도로 손목을 자르고 자결했다. 이에 숙종 때에 정려문을 내리고 정부인으로 추증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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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4-1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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