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안병철 - 2025년 05월 15일 13시47분
[독자투고] 가정의 달, 피해자에게 필요한 건 침묵 아닌 용기
가정폭력은 여전히 많이 숨겨진 범죄 중 하나다. 신고에 비해 피해자는 많다. 상습적 폭력을 당하면서도 “오늘만 피하면 된다”라며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경찰관으로서 때로는 개입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듯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얼마 전의 일이다. 늦은 밤, 112에 다급한 신고가 접수됐다. 남편을 피해 도망쳐 나왔다는 여성의 전화였다. 즉시 출동했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신고자를 만났다. 겉으론 멀쩡해 보였지만 눈빛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로와 두려움이 엉켜 있었다. 그녀는 “술만 마시면 욕을 하고, 때릴 듯이 위협하는 남편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평소에는 말 잘 듣고 조용한 사람인데 술만 들어가면 돌변한다며, 그날은 정말 맞을 것 같아서 도망쳤다고 했다. 그럼에도 처벌은 원하지 않았다. 술만 깨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멀쩡하다며. 겨우 하룻밤만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 그것뿐이었다. 나는 임시 숙소를 마련해주고, 다음 날 경찰서 전담 부서 상담을 안내했다. 필요한 조치와 법적 절차를 설명하고 도와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씁쓸함은 남았다. 정말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가정폭력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경찰은 피해자 분리, 접근금지, 임시 숙소 연계, 심리상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련 매뉴얼이 강화돼 현장 대응도 빨라졌다. 하지만 모든 보호의 시작은 ‘신고’다. 피해자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경찰도 제도도 작동하지 못한다.
더 심각한 건 주변의 침묵이다. “가족끼리 다 그런 거지”, “한두 번이겠어” 하는 말들은 피해자에게 폭력만큼 잔인하다. 이는 방조이며,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만든다.
누군가는 오늘도 “괜찮다”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말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이상 신호를 외면하지 않는 일, 그게 가장 실질적인 예방이 될 수도 있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숨죽여 두려움 속에 잠든다. 사랑받아야 할 공간이 고통의 장소가 되어선 안 된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그림자가 되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이주연 경사(고창서 해리파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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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5-16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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