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화가 채용신, 며느리에게 사진을 가르치다
신필화가 채용신(1850~1941)이 며느리에게 사진을 가르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보고서 ‘한국의 사진관(지은이 노영미, 박수환, 유동화, 유은정, 이재각, 조성실, 펴낸 곳 국립민속박물관)’을 통해서다.
서울 천연당사진관이 대성공을 거두게 된 이유는 사진촬영 가격이 비교적 저렴해진데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진 가격은 소본이 5각, 중본은 1원, 대본은 4원 반, 극대본은 8원이었다. 당시 경찰관의 한달 봉급이 20원, 근위대원의 봉급이 12원이었는데 아직은 비싼 가격이었지만, 화가가 그려주는 초상화에 비하면 저렴한 가격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전업 화가로 공방 시스템을 도입하여 초상화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채용신은 초상화 1장의 가격을 전신상 100원, 반신상 80원으로 책정했다고 한다. 당시 초상화 1장의 가격은 경찰관의 5달 치 봉급을 모아야 할 정도로 고가였는데 이에 비하면 사진은 그 100분의 1 혹은 10분의 1 미만으로 비교적 저렴했다.
1910년 이후 천연당사진관은 사진 대금 미수금 누적으로 외국 상점으로부터 구입한 사진 기재 대금의 상환 지연과 사진관 운영마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점차 쇠퇴기를 겪게 됐다. 본래 화원이었던 김규진은 이후 서화 쪽으로 관심을 돌려서 고금서화관(古今書畫館)을 개설하게 되었다. 한편 1912년에는 사업성 개선을 위해 평양에 분관인 기성사진관(箕城寫眞館)과 고금
서화관 분점을 개설했다. 이후 1915년을 전후해서 기록상으로는 천연당사진관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 사진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대중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김용원, 김규진 등과 같은 화원(畫員) 출신이라는데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당시의 화원들은 정부에서 필요한 기록화와 초상화와 같은 세밀하고 사실적인 표현이 필요한 그림을 생산해야 했기 때문에 한 순간의 장면을 순식간에 있는 그대로 기록해내는 사진술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장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들어가는 막대한 인력과 비용에 비해 사진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도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150여 점의 초상화를 남긴 채용신은 특이하게도 사진을 보내주면 더 빠르게 똑같이 그려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신문물인 사진을 초상화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아들에게 서울 종로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게 했다.
며느리 이홍경(李弘敬)에게도 사진술을 3년간 가르쳐서 1921년에 여성전용사진관인 부인사진관을 운영토록 했다. 채용신은 김용원, 김규진처럼 자신이 직접 사진술을 배우고 익혀 사진업을 하진 않았지만 사진의 중요성과 상업성을 보고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사진업을 시킨 점이 주목된다.
‘경성부 관철동 75번지 이홍경 여사는 자기 집에서 3년 동안 사진술을 연구한 결과 초상화를 정미하게 영하는 묘법을 습득하여 21일부터 사진업을 개업한다는데, 그 사진촬영에 사용하는 렌즈는 유명한 ‘젯사’를 사용한다하며 경성에 부인사진관 개업은 이홍경 여사가 처음이라더라’
이는 조선일보 1921년 5월 22일 기사다.
사진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경성 등 도시를 중심으로 사진업은 경쟁이 심화되어 갔으며 자연스럽게 가격 경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업 초기 하루 만에 1천여 명의 고객을 유치했던 천연당사진관도 점차 영업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며, 1915년 이후로 기록에서 사라지게 됐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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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5-2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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