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재발견]훈몽(訓蒙), 하서가 뜻한 바는 무엇이었나
영남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호남에는 하서 김인후가 있다는 말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9곳 중 1곳,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바로 하서 김인후 선생이다. 김인후는 장성 출신 학자이며, 날 때부터 명석하여 큰 인물이 될 것 이라는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조선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자 절친이 되었고, 인종 승하 후 젊은 나이에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학문연구 및 교육에 매진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문묘에 배향된 유일한 호남 출신 학자이다.
그가 남긴 문집, 그림 등 결과물을 보면 감탄을 아니 할 수 없다. 정조 역시 높이 평가하여 1796년 문묘 조사 교지에 “조선 개국 이래 도학, 절의, 문장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다”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다”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영남지역의 여러 학자들은 누구나 다 아는데, 김인후는 그의 업적에 비해 생각만큼 유명하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조선시대 선비는 출처로 평가받는다. 어쩌면 그가 출처에 능하여 살아남아 역사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인종을 세자시절부터 교육하였고, 그가 훌륭한 임금이 될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새어머니 문정왕후는 그의 친자(훗날 명종)가 왕이 되기를 바라였고, 이후 인종이 즉위하고 8개월 만에 갑작스레 승하하며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김인후는 그 충격으로 낙향하여 이후 하사된 관직도 마다하고 결국 유언으로 자신의 마지막 직책은 인종이 하사한 옥과현감 이었으므로 그리 기록해달라 남겼다. 어찌 이리도 절절한 관계일수가.
김인후가 인종 승하 후, 낙향한 곳이 바로 이곳 순창 훈몽재다. 처향이었던 순창으로 자리를 잡고 훈몽(訓蒙)이라 이름 짓고 후진 양성, 학문연구에 매진하였다. 비록 2년여밖에 머물지 않았으나, 그사이 지은 시문과 그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송강 정철이 13살에 훈몽재에 찾아와 대학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현재에도 훈몽재 앞 추령천변에 대학암이라 쓰여진 바위를 볼 수 있다.
군주이자 친우이고 제자였던 인종을 보내고 슬픔을 머금고 내려와 맞이하는 낙향 생활이었다. 흐르는 강물을 보며 그는 어떤 생각으로 시를 썼을까. 과연 절로 맞이한 이 시간이 마냥 평화로웠을까. 그는 매년 인종의 승하일이 되면 산에 올라가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훈몽재는 김인후가 떠나고 퇴락, 재건을 반복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발굴 이후 건물터가 확인되어 남아있고, 주변에 부속 건물을 지어 활용하고 있다. 훈몽재 근처에는 김인후가 산세를 즐겼다는 낙덕암이 있으며 현재는 낙덕정이라는 정자가 위치하며, 훈몽재부터 낙덕정까지 돌아볼 수 있도록 천변을 따라 선비의 길 관람로가 조성되어있다. 단순한 산책로일수도 있으나 여기서 누가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그 역사를 알고 보면 달리 보일 곳이니 천변을 따라 걸으며 선비의 정취를 느껴보라.
한편, 전북동부문화유산돌봄센터는 국가유산청의 복권기금과 전북특별자치도청의 지원을 받아 문화유산돌봄사업을 진행하며, 도내 동부권역 8개지역의 385개소 국가유산을 관리한다. 2011년부터 국가 및 도지정, 비지정유산을 관리하며 목조, 석조, 근현대건축, 천연기념물 등 각 재질 특성에 맞게 정기적인 상태 모니터링과 전문 모니터링을 진행하여 문화유산 보존관리에 힘쓰고 있다. 또한 작은 훼손부의 경우 큰 범위로 확장되기 전 경미하게 수리하여 예방보존하고고, 국가유산 분야의 전공자와 국가유산수리기능자를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관리를 진행함으로써 국가유산 보존 및 관람환경을 개선한다. /최유지(전북동부문화재돌봄센터 모니터링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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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6-04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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