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6월 04일 15시14분
춘향을 읽다, 춘향을 그리다
일제강점기, 시각 이미지로 본 ‘춘향’
세월이 흘러도 세대를 아울러 사랑받는 대상이 있다. ‘춘향’도 그중 하나다.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 춘향은 어떤 이미지로 그려졌을까? 소설 '춘향전'의 채색 표지화와 삽화, '춘향전병풍' 이미지를 통해 일제강점기 춘향에 관한 대중의 인식과 그 의미를 살펴본다. 이혜원 국가유산청 청주공항 문화유산감정위원이 문화재청의 '이달의 문화유산사랑'에 원고를 냈다.
소설가 최정희는 1940년 10월 '삼천리' 제12권 제9호 '고전명작감상-춘향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춘향전'을 읽기는, 아주 어릴 때였다. 나는 등잔불을 돌아가며, 동네 할머니들이 쭉 둘러앉은 속에서 ‘춘향전’을 구성진 소리로 읽어주는 서당 접장의 펄럭거리는 입을 쳐다보며, 눈물을 좍좍 흘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춘향이가 변사또의 말을 안 들어서, 매를 맞고 옥중에 갇힌 대목이었다. 이 일편단심의 도를 가르친 것이 좋아서 너도 나도 하고 글 쓸 줄 아는 재사들이 여러 다른 춘향전을 써본 것이 아닐까?”
최정희는 함경북도 성진 출신으로 '춘향전'을 경험했다고 진술한 6, 7세는 1912~1913년, 장소는 함경북도였다.
한편 1913년 '고본춘향전'을 출판한 바 있던 최남선 역시 '매일신보' 1938년 7월 30일 '조선의 가정문학'에서 “‘춘향전’ 같은 것도 테마로 말하면 고금에 드문 정렬(貞烈)을 나타냄”이라고 했다. 소설 '션한문 츈향젼(鮮漢文 春香傳)' 초판(1913) 표지화도1를 보면 춘향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죽(梅竹)’ 소재와 함께 그려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춘향전' 신드롬은 소설가 이해조의 '옥중화'(1912)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소설은 전국적으로 흥행했다. 이 소설에는 이몽룡이 성춘향의 그네 타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후 춘향 집에 찾아간 첫날, 춘향모가 이몽룡에게 춘향을 소개할 때 “7세에 '소학'을 읽혀 만사가 두루 통하고, 삼강행실, 인의예지 누가 내 딸이라 하오리까?”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더 흥미로운 것은 춘향의 방을 묘사할 때 '상산사호도', '요지반도도' 등의 그림과 함께 “거북 껍질 책상, 꽃 버들 장식 문갑, 비취 문구 책상, 산호 필통, 마노(瑪瑙) 연적, 용지(龍池) 모양 벼루, 봉황을 새긴 붓, 시와 글씨들이 쌓여 있다”라고 했다. 이를 충실히 반영하려는 의도였을까?
필자는'증슈츈향젼(增修春香傳)' 4판(1918) 표지화 속 누각 그림에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애호했던 매화도, 괴석, 난초 화분을 배경으로 문방구가 놓인 탁자 위에 거문고를 연주하는 춘향이 그려졌다고 했다.
또 '옥중절대가인'(1925)의 권두화도2에서도 춘향의 방은 병화(甁花), 문방도, 거문고를 배경으로 그렸다. 1938년 일본 교토와 오사카에서 공연되었던 신협극단(新協劇團)의 '춘향전' 연극 포스터 이미지에는 인물 없이 ‘문방도’만으로 ‘춘향전’을 광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춘향전'의 인기는 춘향도 전폭 병풍으로 그려지며 향유됐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춘향전도 10폭 병풍'의 예를 보면, 제1폭에서 제3폭은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과 사랑’, 제4폭은 ‘이별’, 제5폭에서 8폭은 춘향의 ‘수난과 열(烈)’을 주제로 가다 마지막 제9폭과 제10폭에서 클라이맥스를 거쳐 행복한 결말을 보인다.
제6폭도3은 변학도가 춘향을 협박하고 춘향이 당차게 항변하는 장면이다. 제발에는 “신관이 왈 네 그년이 대전통편 몰르는 모양이다 하니 (중략) 춘향이 왈 대전통편의 말이 그러하면 유부녀 강간하는 죄는 엇지 하라 하옛소”라 적혀 있다. 좋은 소설의 주인공은 대체로 입체적 성격을 지닌다. 춘향 역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정리 이종근기자
앞서 소개했던 소설 『션한문 츈향젼(鮮漢文 春香傳)』 초판(1913) 표지화의 춘향을 표상한 대나무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형과 늑약의 파기를 요구하며 자결한 민영환과 그의 죽은 자리에서 돋아났다는 ‘혈죽(血竹)’도4을 떠올리게 한다. 일제 강점기 시각화된 춘향의 이미지에는 16세 곱고 여린 외모 안에 문예를 향유할 수 있는 교양과 절개를 지키며 폭력에 맞서 항거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민족의 암흑기, 겨레의 가슴속에 춘향은 그렇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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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6-0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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