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백용규 - 2025년 07월 09일 10시45분
[기자수첩] 김제 변두리에서 피어나는 예술의 뿌리
전북 김제의 만경 들판.
넓고 평평한 땅, 그 위에 펼쳐진 초록빛 논과 길게 누운 하늘. 여름볕에 짙어진 이 들판은, 잠시 스쳐보면 그저 풍요로운 농촌의 한 장면 같지만, 이곳은 오래전부터 아주 다른 삶과 예술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면 ‘문화의 사각지대’라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심이 미처 닿지 못한 자리에서 더 단단하고 오래가는 예술이 피어난다. 만경 들판은 그 증거다. 땅의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예술이 자라는 땅.
이곳에 예술가 서승아가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부토 무용가이자, ‘지신무(地神舞)’라는 토착 퍼포먼스를 창안한 서승아는 도시의 무대를 뒤로하고 만경 들판으로 내려왔다. 논둑 위에서,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농가 마당에서 그는 자신의 몸을 던졌다.
생명의 순환, 땅의 호흡, 인간과 자연이 맺는 오래된 관계를 표현해왔다. 그의 무대는 들판이었고, 계절은 그의 파트너였다.
가을이 오면, 만경 들판은 다시 하나의 예술 공간이 된다.
논길 따라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외지 창작자들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밥을 짓고 노래를 나눈다. 누군가는 멀리서 왔고, 누군가는 늘 이곳에 있었다.
들판은 모두를 품는다.
이렇듯 김제는 더 이상 조용한 농촌이 아니다. 만경은 어느새 세계 예술의 작은 교차점이 되어 있다.
‘지평선 나린아트’.
서승아 감독이 세운 이 단체는 단지 공연 단체가 아니다.
만경 들판을 무대로 삼아 마을과 예술, 땅과 몸, 사람과 자연을 잇는 다리가 되어왔다. 도시처럼 빠르지도, 제도처럼 분명하지도 않지만, 더 오래 지속될 예술의 실천을 꿈꾼다.
최근엔 전주의 민간 공연장 ‘문화공간 이룸’과 손을 맞잡았다. 청년 예술가들을 지원해온 이룸과의 협업은 공연 공동기획, 창작자 공간 공유, 국제 레지던시 운영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간의 연대는 단순한 기관 간의 협업이 아니다. 서로 다른 지형에서 뿌리내린 두 예술 주체가 만나, 예술 생태계의 새로운 경로를 그려가고 있다.
이 연대는 무대보다 땅을 택한 예술가들의 삶, 일회성이 아닌 지속을 택한 창작자들의 땀, 지역과 함께 호흡하려는 느린 실천. 그 자체가 이곳 예술의 뿌리다. 만경 들판은 그 뿌리를 길러내는 터전이다.
지금은 여름.
들판은 아직 푸르다.
그러나 이곳의 예술은, 이미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라고 있다.
만경 들판은 그렇게, 예술이 피어나는 또 하나의 중심이 된다./백용규 기자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지면 : 2025-07-10 7면
http://sjbnews.com/854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