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7월 24일 14시48분
[전북의 창]삶의 흔적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미래를 위한 기록과 보존의 과제
그렇다면 왜 인간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저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문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약속이자 사회적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언어, 유물, 기술, 사상, 감정까지도 기록되고 보존되어 왔기에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석기에서 디지털로, 토기에 담긴 일상에서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이르기까지—인류는 무수한 흔적을 남기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동안 박물관은 과거의 유산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전시해 인류의 문화를 보전해왔습니다. 도서관, 기록관, 자연사 연구소, 종자 저장고, 생물정보센터 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것들’을 지켜왔습니다. 고고학자, 학예연구사, 기록관리자, 생물학자, AI 연구자들은 모두 보존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기록과 보존은 인류 문명의 안정적인 기억을 구축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습니다. 정보의 양은 폭증하고, 삶의 양식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데이터는 클릭 한 번에 생산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일상 속 ‘소중한 것들’조차 기록되지 못한 채 잊혀지기 일쑤입니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 남겨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기록과 보존의 주체도 새롭게 조정되어야 합니다. 이는 더 이상 전문가만의 일이 아니라,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생활기록의 시대’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농촌의 삶, 시장의 풍경, 공동체의 축제, 손때 묻은 도구 하나까지도 지역 주민과 함께 이야기되고 수집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야말로 공동체의 뿌리이자, 사라져가는‘현재의 미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주민 참여형 마을 아카이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 ‘미래유산 아카이브’, 부산 영도의 ‘섬, 기록하다’ 프로젝트, 성남문화재단의 ‘지역기록학교’, 고양시의 ‘마을 아카이브 사업’ 등은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삶의 가치를 기록하고 미래 세대에 전승하려는 시도입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문화체육관광부는 2023년부터 ‘생활문화 아카이브 구축’을 지원하고 있으며, 행정안전부와 국가기록원 역시 민간기록물 수집과 지원 확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흐름이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록과 보존을 담당할 전문 기관과 인력의 역할 강화가 필수적입니다. 박물관과 기록관은 단순히 유물과 문서를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삶의 지혜와 감동을 전하는 ‘살아있는 문화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박물관은 과거를 전시하는 데 머물러선 안 됩니다. 오늘을 기록하고, 내일을 설계하며, 사람들과 연결되는 ‘살아있는 기억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박물관이 존재해야 할 새로운 이유이며, 미래를 위한 보존의 방식입니다.
또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공공의 책무 아래 민간과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합니다. 기업 또한 ESG 경영 차원에서 사회적 기록의 보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공공의 기록은 더 이상 공공만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자산입니다. 기록은 곧 선택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는, 우리가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와 맞닿아 있습니다. 사라지는 것을 지키는 일, 지금 이 순간을 새기고 내일로 이어주는 일—그 역할을 우리는 함께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지켜주지 않습니다. /노기환(온문화유산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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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7-2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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