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8월 24일 14시23분
[온누리]어머니의 도시락
도시락을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흑백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도시락을 밴또라고 하신다. 일본말이지만 밴또에는 나름 정감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어머니의 도시락은 밥상의 밥과 다르지 않았다. 도시락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뚜껑을 여는 순간 남과 비교된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벽돌처럼 생긴 밴또를 열면 한쪽은 반찬 그릇이 차지한다. 칸이 나눠 있지 않아 반찬은 김치 하나다. 칸이 구분돼 있다 해도 넣을 반찬은 마땅히 없었다. 덮개가 없으니 김칫국물이 넘쳐 주변 밥은 늘 붉었다. 더구나 여름엔 쉰내가 났다. 밥을 얼마나 눌러 담았던지 젓가락이 안 들어갈 때도 있었다.
김치 반찬뿐인 도시락도 꿀맛이어서 훔쳐 먹는 친구들이 있었다. 체육 시간에 슬그머니 교실로 들어와 남의 도시락에 손을 댔다. 수법도 교묘해서 도시락을 엎어 본채를 뺀 다음 가운데 부분을 야금야금 긁어먹고, 본래대로 놓았다. 젓가락이 허망하게 빠질 때야 주인은 비로소 알아차린다.
초등학교 소풍 때였다. 앞 동네 친구가 김밥을 싸 올 거라며 자랑을 했다. 나도 김밥을 싸달라고 했다. 그게 뭐 어렵냐며 어머니께서 김으로 밴또를 싸주겠단다. 그리고 소풍 날 친구 도시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밥이 꽃처럼 예뻤다. 서울에서 내려온 누나가 온갖 재료로 멋을 낸 김밥을 그때 처음 봤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내 밴또를 살짝 열어 봤다. 그리고 또 깜짝 놀랐다. 안이 깜깜했다. 친구가 보이지 않은 곳으로 가 몰래 밥을 먹었다. 김 한 장에 밥 한 숟갈을 간장에 묻혀 싸고, 그걸 켜켜이 쌓아 눌렀으니 온통 엉켜있었다. 어머니에게 김밥은 밥상의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성격이 무던해 치밀함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가끔 잊고 젓가락을 넣지 않으셨다. 도시락에 대각선으로 놓여 있어야 할 젓가락이 안 보인 것이다. 그런 경우 대개 식사 끝난 친구의 것을 빌려 먹는다. 그런데 나는 무조건 굶었다. 잘 챙겨달라는 신호이자, 일종의 보복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머니께 미안하다.
집 근처 초임교사로 발령을 받은 첫날 어머니께서 또 밴또를 싸주셨다. 명색이 선생님이니 도시락도 달라야 한다고 여기셨는지 양은이 아닌, 알루미늄 재질의 원형이었다. 식당의 배달 점심을 먹는 선배 교사들에 싸여 도시락을 열었다가 또 민망했다. 엄청난 양의 밥에 반찬은 역시 김치 한 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도시락이다.
도시락의 트라우마가 내게는 깊다. 학교 다닌 적이 없으니 어머니에게 도시락은 그냥 밥그릇이다. 남과 비교되는 문화나 세련된 간편식의 개념은 아예 없으셨다. 환자복에 자식의 도시락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창피해도 좋으니 어머니께서 싸주신 밴또가 새삼 그리웠다.
/김판용(시인·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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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8-2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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