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09월 25일 14시52분
고구려 유적 훼손에 비탄…‘천지’에 비친 ‘절경’에 감탄
‘어쩌다 농부’의 인생삼락 5.고구려유적·백두산 탐방화가들과 한문화 원류 기행 30년만에 방문
3박4일간 국내성터 등 집안 유적 둘러봐
호분석 사라진 장군총 등 원형 변형 우려
은퇴후 시간 날 때 즐기는 일이 옛날 기사 스크랩을 들춰보는 ‘추억여행’이다. 오래전 썼던 기사들을 다시 읽다보면 그 시기 있던 일과 경험, 느낌들이 되살아난다. 기사를 읽다 보면 좀 더 재미있게, 잘 썼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남기는 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과 인연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기자 업무는 마감시간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크지만 기록을 남겨둔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직업이라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그동안 인상적이었던 해외취재를 꼽으라면 1995년 광복 50주년과 정부가 정한 ‘미술의 해’를 기념해 추진했던 ‘한문화 원류를 찾아-고구려 발해유적지 스케치기행’(이하 ‘고구려 스케치 기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부 기자 발령 2년도 안된 어린 기자가 국내 중견화가 12명과 함께 25인승 전세버스를 타고 이 해 8월 19일부터 9월 2일까지 14박 15일간 만주대륙과 압록강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대장정이었다. 심양 장춘 길림 돈화 연길 통화 백두산 지안 환인 단동 등은 물론, 산골 오지까지 샅샅이 누빈 거리는 무려 1만리(4,000여㎞)에 이른다. 당시에는 이 일대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직후라서 산사태로 길이 막히고, 다리가 끊어져 매일 고난의 강행군을 해야 했다. 중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동북공정을 펼치기 전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진안 삼락원에서 돌아온 8월 초, 옛날 기사 스크랩을 훑어보던 중 이 기획들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만났던 고교동창으로부터 조만간 백두산 여행을 간다는 얘기를 듣고 난 후 친구 2명과 함께 패키지여행 상품을 구매했다.
거울인가? 호수인가? 백두산 최고봉인 북한쪽 장군봉(2744m)이 고요하고 맑은 천지 수면에 비치고 있다. 장군봉 꼭대기에 초소가 있고 아래쪽으로는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과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보인다.
이번 여행은 3박 4일 일정으로 심양 집안 통화 백두산을 갔다가 다시 통화를 거쳐 심양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심양공항을 출발해 버스로 이동한 거리만 총 1,500㎞였다. 첫날 일정은 고구려 유적의 보고인 집안의 광개토대왕릉, 광개토왕비, 장수왕릉(장군총), 국내성터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 유적지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있고, 2019년 5A(AAAAA) 등급으로 지정됐다. 중국은 관광지의 중요도에 따라 1A~5A 등 5등급으로 나눠 관리하며, 5A급 관광지는 300곳이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와 광개토대왕릉 주변은 1급 관광지로서 공원처럼 단장되어 있었다. 이 비는 왕릉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한글 안내판에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비석 중 하나로 전국 첫 번째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으며 국가 첫 고고학유적 파크’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모든 고구려 유적지에서는 한국어로 질문을 할 수도 없고 설명도 할 수 없다는 걸 가이드는 사전에 여러 차례 강조했다.
1995년 한문화원류기행 5회째 연재된 ‘백두산’ 기사. 당시에 일행은 북파 코스로 올라가서 천지를 감상했다.
천지에 오르는 북파코스는 버스에서 내려 길을 따라 줄서서 올라가야 한다.
문제는 광개토대왕릉 관리 상태였다. 원래 돌무지무덤으로 이루어진 왕릉은 지금은 여기저기 무너진 채 흙과 뒤섞여 동산처럼 방치돼 있다. 게다가 왕릉을 쌓아올린 돌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어 관광객들이 오르내림으로써 훼손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오래 전 도굴됐던 석실은 관이 보관돼 있던 자리인데 그대로 공개돼 있다.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 관리도 우려스럽다. 발견당시부터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인 장군총은 피라미드식 정방형인데 북쪽사면이 조금씩 밀려나와 불룩한 모양으로 변하고 있다. 석재를 쌓아올린 구조상 시간이 지나면서 중력에 의해 돌이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단부에 호분석 3개씩을 기대어 놓았는데 북쪽 사면 호분석을 가져갔다고 한다. 무개가 10톤에 이르는 거대한 자연석을 가져가는 것을 몰랐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변형되고 있는 왕릉을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진다.
국내성터였던 집안시는 완전한 관광도시로 탈바꿈하면서 이젠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힘든 것 같다. 1995년에 왔을 때만해도 일부 성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도심개발이 한창이었다. 당시 기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인 관광객의 폭증으로 시 수입이 증가하자 시가 주거환경개선과 도시정비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도시 못지않은 상가와 아파트촌을 세우고 있다. 1,500년전에 융성했던 ‘황성옛터’가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개발사업으로 시 중심부에 있던 국내성터는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다. 특히 동쪽과 남쪽 성터는 복개·매립 공사 등으로 흔적도 없어졌으며 겨우 북쪽과 서쪽 성터만 군데군데 남아 지난날의 영화를 쓸쓸히 증언해 준다. … 주민들이 주요 성벽을 헛간 등 부속건물로 개조한 것은 예사이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집안시는 23만명이 살고 있는 관광도시로 자리잡았지만 도심에 있던 성벽은 찾아보기 힘들다. 거리 한켠에 국내성 기념비 하나만이 덩그러니 서서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이 되고 있을 뿐이다.
첫날 저녁 통화에서 숙박한 후 이튿날 이도백하를 거쳐 백두산으로 향했다.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길은 시작하는 방향에 따라 북파, 서파, 남파 3가지 코스가 있다. 북파는 이도백하-천문봉-비룡폭포 코스, 서파는 송강하-5호 경계비 코스, 남파는 송강하-장백현-관면봉 코스이다.
우리는 북파와 서파를 하루에 한 코스씩 선택했고, 두 번 다 화창하고 고요한 날씨에서 천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서파쪽에서는 바람 한 점이 없는 날씨에 천지 수면에 잔물결이 일지 않아 16개 봉우리를 거울처럼 비추는 명경지수의 절경을 연출했다.
가이드는 “우리가 가기 일주일 동안 계속 비가 내리면서 출입이 통제됐다”면서 “백두산에 수십번 올랐지만 이처럼 날씨가 좋았던 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백두산 천지가 왜 천지인줄 아는가. 천지를 못 본 사람이 천지라서 그렇다”든가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데 여러분은 정말 운이 좋다”고 강조했다. 1년중 백두산 개방은 5~9월까지 5개월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천지를 볼 수 있는 확률은 20%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 말이 과언은 아니다.
백두산은 우리 역사와 함께 한 영산이다. 특히 조선조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 땅으로 굳게 선포한 김종서 장군과 남이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지켰던 우리 땅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역사의 두 영웅은 억울한 모함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공교롭고 한스럽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4군 6진의 영토를 개척한 김종서 장군의 시조를 보면 말을 타고 백두산을 오르는 당당한 모습이 그려진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어떻다 인각화상(麟閣畵像)에 뉘 얼굴을 그릴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의 얼굴을 그려 건다는 기린각(인각화상)에 탁상공론을 펼치는 선비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대장부 중 누구의 초상을 먼저 그려 넣는지를 묻는 내용이다.
또 어린 나이에 여진족을 토벌한 공을 세운 남이 장군의 장쾌한 시에서도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북파 코스 천문봉은 계단을 따라서 100여 미터를 올라가 천지 둘레길을 따라 사진을 찍고 내려오게 돼 있다. 하지만 밀려드는 인파로 사진 찍기도 힘들 정도다. 30년 전에 갔을 때는 계단도 없었고 천지 방향 안전통제 밧줄도 없었다.
이튿날 오른 서파코스는 1,442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계단이 보폭에 맞춰 만들어져 매우 편하기는 했지만 40분간 쉬지 않고 오르기는 쉽지 않다. 장사의 천재인 중국인들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정상까지 왕복하는 1인승 가마가 있었다. 2인 1조의 가마꾼이 앞뒤에서 들고 이동하는 가마를 타면 노약자도 편안히 다녀올 수가 있다. 가마 왕복 요금은 우리 돈으로 4만~8만원으로 몸무게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고구려스케치여행 당시 연변지역 마을 곳곳에 ‘백두산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라는 덩샤오핑의 말이 플래카드로 만들어져 걸려 있었다. 이처럼 백두산은 중국인들에게 성스럽고 신비한 곳이다. 백두산 여행객이 2023년 기준으로 273만명에 이른다. 백두산을 경유하는 중국 고속철도가 올해 10월께 개통될 예정인데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 같다.
3박 4일의 백두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이드는 중국의 격언을 하나 알려주었다. ‘백년동안 인연을 쌓아야 한 배를 타고, 천년 동안 인연을 쌓아야 베개를 나란히 한다’(백년수득동선도(百年修得同船渡) 천년수득공침면(千年修得共枕眠). 인간이 태어나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맺은 인연의 깊이와 가치가 얼마나 깊고 귀한지를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1500년 전 우리 조상의 숨결과 손길이 닿은 만주벌판과 백두산 절반이 중국땅이 되면서 목숨 걸고 지켜냈던 조상과의 연이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이 매우 씁쓸할 뿐이다. /최진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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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9-2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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